편지(Letter)와 사명

KBS, 04, 나그네 설움과 God,

정희득이본명이자가명 2007. 3. 2. 00:53
 

오늘의 하루 20060807 월요일



오늘은 서울의 마른 하늘에 가벼운 비와 더불어 천둥이 치는 날이다. 지난 번과 꼭 같이 들릴 곳을 들리고 서울의 금융 중심가에 섰을 때 가벼운 비와 더불어 천둥이 지난 번과 거의 같은 현상으로 치는 날이다.



지하철을 타고 갈아타고 또 갈아타고 오목교에 있는 사랑스러운 대학교 후배를 만나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며 사는 정말 다양한 이익을 추구하며 사는 사회에서 특정한 대상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서로 간에 공정하고 정당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규정과 규제와 법률이 어떻게 이해가 되고 오해가 되고 설상가상으로 본질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은 악용이 되고 있는 경우들에 대해서 모처럼 대화를 나누고 더불어 근래의 생활 수단과 생계 수단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또 어떤 변화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궁핍한 존재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말을 나누고 나아가 부동산 경기가 활성화 되어야 하겠지만 부동산 경기를 핑계로 몇몇 관련자와 이익을 보는 이해 관계자들 외에는 어느 누구로부터 납득을 얻고 있지 못하는, 공개적으로 이해를 얻고 있지 못하는, 몇몇 대단위의 사업들에 대한 말들도 나눈다.



>>> 그런데 그런 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당장 이곳저곳 다닐 교통비도 없고 배고플 때 먹을 끼니 값도 없는데 앞이나 뒤와 같은 말이 귀 없는 벽에 대고 청청한 하늘을 향해 하는 무슨 공허한 말들일까?


무엇이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최고 학부를 졸업한 사람들조차도, 원기 왕성한 젊은이들조차도, 무엇이든 힘이 있는 것이 권력이든 부든 가진 자가 말하는 세상이라고 말을 할 정도로 변하게 만들었을까?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근래에 알게 되기로는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사회 구성체를 떠나서, 권력이든 부든 가진 자가 말하는 세상이고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힘이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문제이고 얼마나 하는 것이 문제이고 등등 그런데 그런 말들이 일상 친구들 사이의 대화 속에서 나올 정도로 그것도 자조감에 섞여서 말이 나올 정도로 무엇이 우리 사회를, 우리 사회의 생산 계층을, 그렇게 만들고 점점 폐쇄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을까? <<<



일정이 바쁜 관계로 지하철을 타고 갈아타고 종로의 모처에 내린다. 무슨 행사가 있는지 행사를 안내하는 여성들이 많다. 미스코리아(Miss Korea) 심사 대회에 나온 분위기다. 나누어주는 부채를 들고 모 금융기관에 들러서 요즈음의 통신 수준의 발달을 반영하는 금융거래 칩에 대해서 문의를 한 후 다시 걷고 걸어서 을지로 입구까지 간다. 비가 조금씩 마치 더위를 식혀주듯이 내리고 있으나 또한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 관계로 별로 신경 쓸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감사를 할 일이다. 을지로 입구에 있는 모 금융 기관에서 볼 일을 보고 나오니 비가 조금씩 내리며 하늘에서는 천둥이 요란하다. 지난번의 경우와 꼭 같은 현상이다.



>>> 아마도 하늘도 아는 모양이다. 단지 사사건건 간여나 간섭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마도 하늘도 알 것은 아는 모양이다. 오늘의 코스(Course) 뿐만 아니라 일기 예보가 어떠하든 2003년 6월 15일 또는 6월 30일 이후 지금껏 3년 동안 이곳저곳을 다니는 동안 같은 코스(Course)를 방문할 때에는 같은 일기 현상이 나타난 것이 꽤 많은 것으로 보아서 우연이라고 생각을 해도 좋고 뭐라고 생각을 해도 좋으나 아마도 굳이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영(God;Spirit)들이라고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우주의 삼라만상이 존재케 한 절대적 존재로서 막연히 하늘이라고 할 때의 하늘도 아는 모양이다.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누군가가 화분에 물을 주듯이 물뿌리개를 들고서 물방울을 뿌리고 있는 것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그 날 그 순간 비가 내릴 것도 아닌 것이 정말 묘한 비가 정말 많았던 5년이고 3년이 아닌가 싶다. 북한산의 상장봉에서 몇 번인가 있었던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그러나 맞은 곳을 처다 보니 맞은 흔적이 전혀 없는 그런 것을 두고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니 현실이라 할까? 아니면 환영이라고 할까? 경기도 수원시 숙지산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가늘게 내리던 가랑비가 거꾸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니 실제라고 할까? 아니면 환영이나 허상을 본 것이라고 할까? 경기도 수원시 주공아파트 앞에서 비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본 것이 환영이나 허상이라고 표현을 할까?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니 현실이라고 할까?


신(God;Spirit)의 존재에 관한 것이든 공산주의를 비롯한 이념주의나 이상사회의 실현, 방법론이 제일 중요한 안건이겠지만, 가능성에 대해서이든 상식선에서 생각을 해 보고 상식선에서 말을 하자고 하니 상식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아서 다른 사람이 해야만 하고 이루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나아가 삶에 대해서 기만과 농락과 유혹을 하여 다른 말들 하게 만들고 십 수 년 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고문과 희롱만 하다가 상식이란 사람 밑에서 그 사람의 직업을 갖게 하는 계획을 세우고 또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기획을 하고 나아가 직접적으로 영향까지 미치고 있는 사회에서는 무엇이라고 표현을 할 것인가?


본인들이 정치인이 되고 싶고 국회의원이 되고 싶고 대권을 갖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추구하고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인데 정치인이 되고 싶고 국회의원이 되고 싶고 대권을 갖고 싶다고 하면서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들은 숱하게 많은 선한 사람들의 삶 자체를 기만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희롱을 하고 그 결과 고문만 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런 것을 계획이라고 하고 기획라고 하고 능력이 있다고 하는 곳은 어떤 곳이고 어느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아마도 소설이나 만화나 영상 속에서만 가능한 사회가 아닐까? <<< 



다시 지하철을 타고 또 갈아타고 성남시에 내리니 하늘이 정말 쨍쨍한 것이, 언제 마른 서울의 하늘에 천둥이 있었고 언제 가랑비가 더위를 식혀 주듯이 내렸는가 싶게 푹푹 찌는 것이, 바닷가나 계곡에서 물에 몸 담그기 좋은 때인 것 같다.


>>> 그러나 돈은 못 벌어도 하는 일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많다 보니 휴가를 생각도 못해본지 벌써 몇 년째 된다. 아마도 누군가가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 또는 돈을 벌거나 정치와 관련하여 돈을 벌기 위해나 정치인이 되고 싶어서 여기 저기 쫓아 다녔던 사람들 중에서 몇 년 동안 휴가도 못 간 분들이 있는 모양이다. 누군가가 그분들의 경험을 알게 하기 위해서 어느 곳에선가 누군가가 또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양이다. 믿거나 말거나 2001년 8월 16일 그 날 그리고 1986년도 그 당시에도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알고 있다.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교에 복학을 하여 다닐 고 있을 때 친구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죽일 듯이 하려고 한 경우가 있었다. 대략적인 경우로 보건데 그 일의 속성상 한 명이 다른 한 명이 24시간 몇 일이든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쫓아다닐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막기 힘든 일이고 또 쫓아다닌다고 하더라도 다른 친구가 만나는 사람들끼리 상호 간에 서로 암묵적인 묵시가 이미 이루어진 경우이면 막기가 힘든 경우이고 더불어 구체적인 일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행동을 하면 결국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상해든 무엇이든 범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앞과 관련된 것이면 목숨을 끊어야 될 것이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해결은 아닐 것이니 결국 죄를 짓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결과만 남게 되니 구체적인 일은 모르겠지만 달리 생각을 해보란 말을 한 때가 있었듯이, 다른 몇몇 유사한 경우들이 더 있었지만 결과는 비슷하듯이, 1986년도 그 당시나 2001년 8월 16일이나 경우나 나를 둘러싸고 일어난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더불어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을 몰라서 막지를 못하거나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니 그냥 나의 갈 길대로 사는 것뿐이고 지금 현재 어려움이 처하게 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 돈을 버는 방법이나 돈을 벌 수 있는 일의 속성이 그렇듯이 생계와 관련된 문제가 말로는 “돕는다.” “돕는다.”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당사자가 처한 경우나 처한 상황이나 처한 사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오히려 아랑곳 하지 않고 이런 목적 저런 목표를 가진 이런 사람들 저런 사람들에 의해서 시달리고 차단이 당해서 그런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닌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대한민국에만 4천 5백 만 명이 살고 있으며 줄이고 줄이고 가리고 가리고 하더라도 그래서 몇 몇 본보기만 되는 사람들의 경험들을 대상으로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삶의 경험들만 경험하며, 비록 최장수 한 사람의 몇 배를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기간의 문제이지 지금 현재는 지금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하면 육십 세가 넘으면 일상적인 방법으로 사회 경제 활동을 할 수가 없는데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다른 사람의 삶을 경험하며, 살 수가 있을 것이며 더구나 경험을 한 경험들이 경험한 사람의 삶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괴롭힘과 고문과 시간의 손실만 가져오는데 왜 필요하고 왜 해야만 하며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당사자의 삶을 망치고 있는 것이면 “산 경험”, “산 지식”,“체험 삶의 현장” 등등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을 특정한 사람을 대상으로 실현을 하기 위해서 전담할 사람까지 두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그런 상황은 만들기 위해서 계획과 기획을 하는 사람을 두면서까지 그리고 진행 상황까지 일일이 체크를 하면서까지 그것도 여러 사람들이 협조를 하여 일정 정도 법망을 피하거나 법의 구속 요건을 피하거나 아니면 법의 혜택을 받으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하나의 예를 들면 성공하고자 절치부심하던 어떤 분이 있어서 각고의 노력을 하던 끝에 어떤 경험을 통하여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하자 누군가를 꼭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에 두면 꼭 같이 성공을 할 수가 있을까? 능력이 같다고 한다면 꼭 같이 성공을 할 수가 있을까? 절대적인 잣대나 기준은 아니나 흔히 하는 말로 부모 세대 다르고 자식 세대 다르고 서울이 다르고 뉴욕이 다르다는 말이 있다. 즉 같은 환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이 반응을 달리 한다는 것이고 누군가의 성공한 경험담이 중요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 수 만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 때 그 때마다 모두가 같이 또는 비슷하게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설사 누군가를 모델링(Modeling)을 하여 그 누군가에 대해서 일거수일투족을 백과사전처럼 외우고 있어서 대체로 매일 같이 일어나고 접하게 되는 일들에 같이 또는 비슷하게 반응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또 달리 반응을 하고 그 상대방 또한 먼저 경험을 한 사람과 같은 시대 같은 환경에 있지를 않다는 것이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적인 축약된 경험의 말들이, 예를 들어 속담이나 격언과 같이, 즉 돈을 버는데 있어서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등등 참조나 지침이 될 만한 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참조를 할 수 있게끔 수첩에 적어 다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경험의 말이나 그런 경험을 알게 하고 같은 상황에 처하게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의 일거수일투족을 묶어 둔다면 오히려 돕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힘들게 하지 않을까 싶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던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것과 맞게끔 상대방에게 맞게끔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으며 실제로 비용은 하늘에서 떨어지는지 땅에서 쏟아나는지 모를 일이다.


앞의 경우와는 또 조금 다른 것으로서 말을 하면, 신(God;Spirit)을 만난 경험이 있고 신(God;Spirit)의 세계의 영적인 무엇인가가 몸 안에 있고 여타의 많은 사람들과 관련된 경우나 현상을 제외를 하더라도 신(God;Spirit)을 만난 흔적도 몸에 있고 그리고 언제가 다시 신(God;Spirit)을 만날 수 있고 또 예정된 것은 아니나 신(God;Spirit)의 뜻에 의해서 예기치 않게 우연찮게 만날 수도 있다고 말을 하여서, 즉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으나 사람과 대화가 가능하고 대화를 하는 사람이 인지가 가능하도록 그럴 수고 있다고 말을 하였다고 하여서,


나아가 내가 말하고 있는 그 신(God;Spirit)이란 존재가 자체가 사람이나 사람의 영혼과는 전혀 별개인 우리가 영(God;Spirit)이라고 하는 존재로서 가상이거나 추상이거나 단어상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실존을 하고 있는 존재라고 말을 하며 지금껏 우리 사회에서 오래 되었고 만연하게 알고 있는 불교나 유교나 도교와 관련된 것이 아니며 성경과 기독교에 가깝다고 말을 하며 특히나 기독교라고 하더라도 몇몇 사람들이 기독교나 성경(The Bible)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 그런 신앙이나 종교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고 말을 하며 내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굳이 우리 것에서 찾고자 하면 산신이나 막연히 절대적 존재자로서의 하늘이라고 할 때의 하늘의 개념에 가깝다고 말을 하며 나아가 성경(The Bible)에 대해서 말을 할 때 구약과 신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과 신약이 일맥상통한 것이며 오히려 구약이 성경을 이해를 하기가 싶고 신약은 자칫 잘못하면 혼란을 가져오기가 쉽고 개인적인 신앙으로 흐를 경우가 많다고 말을 하며,


또한 성경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본 따서 사람을 창조하였던 부분에 대해서는 신(God;Spirit)의 존재가 영(God;Spirit)이니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사람의 영혼이 사람이 감지를 하기가 어렵듯이 영(God;Spirit)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굳이 사람의 형상이란 부분에 지나치게 얽매이거나 집착을 하기 보다는 -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면 어떤 사람의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에 가장 가까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지상에서 재력이든 권력이든 무엇이든 권세가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 언젠간 말하여지게 되고 정말 삶이 심심하고 무료한 몇몇 동조들이 나서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 그로 인하여 칼로 칼싸움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어는 날 많은 여러 사람들이 원인도 모르고 분란과 혼란과 곤란에 휩싸일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니 -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은 영(God;Spirit)이란 존재이고 영(God;Spirit)이 실제로 우리들이 인식을 할 수 있게끔 묘사를 하거나 표현을 하기는 힘들지만 실존을 하고 있는 존재라고 말을 하고 그렇게 표현을 하여 그렇게 늘 생각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더 낳지 않을까 하고 말을 하고 또한 영(God;Spirit)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사람의 형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실제로 영(God;Spirit)이날 말 자체가 그렇듯이 영(God;Spirit)의 존재가 - 즉 나의 말로 표현을 하며 통신 능력과 무한한 지적 능력과 무한한 힘의 능력과 무한한 변신 능력과 무한한 창조의 능력  등등이 있는 이동 능력에 한계가 없고 생존에 시간의 제약이 없고 삶과 죽음이 개념이 없는 한 점의 빛과 같은 존재로서 - 형상이 없을 것인데 사람을 만났으니 경우와 여건에 따라서 사람이 인식을 하여 볼 수 있게끔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순서상 맞지 않을까 하고 말을 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서도 성경에서도 영(God;Spirit)이 몸 안에 거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듯이 비록 성령에 의해서 잉태가 되고 영(God;Spirit)의 세계에서 영(God;Spirit)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낸 영(God;Spirit)이 거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영(God;Spirit)의 존재로서의 모습과 또 육체가 죽임을 당하듯이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동시에 존재를 한다고 말을 하고 또한 비록 영(God;Spirit)의 세계에서 왔으며 성경에서도 신(God;Spirit)을 만나거나 신(God;Spirit)이 몸 안에 거하는 사람을 신(God;Spirit)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니 (여호와) 하나님이란 표현이 있으니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선 하나님이란 말 대신에 영(God;Spirit)의 세계의 영(God;Spirit)이 거하고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 표현을 하는 것이 비록 표현이 길지만 좋은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나중에 사람들이, 성경을 마치 학문처럼 깊이 있게 연구를 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사람에 대한 개념을 혼동하지 않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즉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고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 예수님이 영(God;Spirit)의 세계에서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God;Spirit)이시나 사람이 몸 안에 거하여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기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이 각각의 이름으로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난 또는 사람의 모습으로만 사람들이 인식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영(God;Spirit)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시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을 신성시 하는 의미에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을 함으로써 먼 훗날 왜 그런 말이 나돌게 되었는지 잊을 쯤에 지구상의 누군가가, 즉 실제로 사람인 지구상의 다른 종교의 교주가, 또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으로 불릴 수 있는 존재로 둔갑이 될 수가 있는바 그렇게 되면 결과론 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오히려 혼란과 허상으로 이끌 수 있으므로 그렇지 못하게 사전에 방지를 할 수 있게끔 하는데 일조를 하게 될 것이라고), (즉 조금 더 나아가면 그 결과 그리스도 예수님 이전에 태어난 다른 종교의 누군가가 그리스도 예수님보다 서열상 어떻게 되니 하는 말들이 비록 말장난이나 농담이라고 하더라도 언급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게 하지 않게끔 하는데 만의 하나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을 하고,


그리고 성모 마리아님에 대해서도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이 된 것이 확실하고 그 결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출산을 하신 것 등 성경에 말한 대로 모든 것이 확실하지만 단지 사람이 사람의 생각이나 상상력이나 이해의 수준으로 이해를 하는 것에 있어서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에 대해서,


태아시기부터 영(God;Spirit)의 세계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God;Spirit)이 (더불어 성령이)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이름 불러질 몸 안에 거했다고 보고 세상에 태어나신 후 점점 성장하는 과정 중에 성경에도 있듯이 성령을 받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달리 생각을 하면 영(God;Spirit)의 세계의 성령이 수정란으로 변하여 잉태가 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고 그 이후 잉태된 시기부터 영(God;Spirit)의 세계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God;Spirit)이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이름 불러질 몸 안에 거하게 되고 태어난 이후 성령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 달리 생각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를 하시고 사람을 창조를 하셨으니 동정녀 마리아님의 몸속에 태아나 사람 된 수정란이나 정자와 난자의 수정란을 창조를 하는 것이 뭐가 어렵고 이상할 것이 있을까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창조라는 말 대신에 성령으로 잉태된 이라고 표현을 한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사람이 뼈가 몸의 한 부위에서 아무런 외상도 흔적도 없이 몸의 다른 부위로 옮겨지는 것이 가능하듯이 그리고 심지어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사회적 목적으로 나를 찾았던 옆에 있는 몇몇 사람들조차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인지를 하지 못하게 그런 일이 약 35년 전에도 가능했듯이 그 당시 그 지역에서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가장 총명하고 의로운 경우가 될 요셉과 성모 마리아님의 정자와 난자가 본인들도 모르게 성모 마리아님의 몸에서 결합이 된 것이 맞지 않을까 하고 말을 하고 조금 더 사람의 수준에서 보게 되면 고대의 위대한 사람에 대한 설화나 우화가 있듯이 정상적인 결합에 의한 것이지만 (소설을 조금 더 쓰면 성경에도 감옥을 탈출하게 되는 경우들을 비롯하여 많이 실제 예들이 있듯이 사랑하는 연인 간에 성령에 의해서 비몽사몽간에 이끌리게 되나 당사자들은 전혀 인지를 못할 수도 있고) 앞의 경우에 의해서 잉태된 순간부터 성령이 그리고 영(God;Spirit)의 세계의 영(God;Spirit)이 그리스도 예수님 몸에 거하게 된 것이고 점차적으로 성장하면서도 성령을 받고 또 성령을 부어 주고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을 하고,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영(God;Spirit)의 세계의 일에 대해서, 비록 실질적인 경험이나 체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경험을 하거나 체험을 한 정도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인식을 하게 하는 것 자체가 힘들며 무엇보다 영(God;Spirit)의 세계 자체에 대해서 사람이 인식을 할 수 있게끔 표현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인 만큼, 알기가 힘든 것은 힘든 것이고 어떤 경우나 확실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영(God;Spirit)들은 영(God;Spirit)의 존재이신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경우 사람이 인식을 할 수 있기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고 사람으로서의 속성도 있으나 그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 땅에 보내신 영(God;Spirit)이 거하고 계시어서 온갖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나 자연 현상을 부리는 것이나 성령을 받고 성령을 부어 주는 것이나 등등 성경 속의 기적들이 가능한 것이니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고 말을 한 것이며(물론 성경에서 말을 하고 있듯이 신(God;Spirit)을 만나거나 신(God;Spirit)이 거하고 있는 사람을 신(God;Spirit)이라고 말을 하지만 이는 사람이 표현을 하고 인식을 하기 위한 것이고 그 사람의 몸 자체가 신(God;Spirit)의 정체성은 아니니 비유적으로 또는 사람의 표현상 신(God;Spirit)이라고 말을 하는 경우와 신(God;Spirit)의 정체성에 대해서 조금은 구분을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음),


이러한 사실들이 누구라고 말을 하기 힘든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마치 도전 꺼리가 만들어진 것처럼 실제가 내가 말을 한대로 라고 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영(God;Spirit)들이 천지를 창조했듯이 “무(Nothing)에서 유(Something)를 창조”하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 보라고 그래서 그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정말 삶이 심심하고 무료한 몇몇 사람들을 두고서 나의 생활에 대해서, 또는 나와 비슷한 경우의 다른 누군가의 생활에 대해서, 사사건건 간여나 간섭을 하는 식으로 상황 조절을 하는 경우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신앙심과 경건함에 대한 구차한 변명은 아니고 나를 이해를 하고 나의 말을 무조건 믿어달라는 말은 아니고(시간이 되어 나의 글들을 읽어 보고 내가 한 말들의 내용 자체나 실제로 그 동안 있었던 상황들을 보면 비록 경험이나 체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믿을 수 있는 말인지 허황된 거짓말인지 하는 것은 본인들이 판단을 할 것이 아닌가 싶음) 영(God;Spirit)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고려를 할 것으로 몇 마디 말을 하면 영(God;Spirit)의 세계의 여호와 하나님의 보내신 영(God;Spirit)이 거하고 성경에서의 질병 치료와 자연을 부리는 기적이 가능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어서 방언을(다른 지방이나 국가의 말을) 말을 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러나 또 이미 예정된 죽음에 이르기 전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그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듯이 그리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 돌아가시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사후에 영(God;Spirit)으로서의 존재는 죽지를 않고 마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영(God;Spirit)들이 이 땅의 사람들을 만난 것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생전의 모습으로 사람들이 눈으로 인식을 할 수 있게끔 경우에 따라서는 현상만 느끼고 음성만 들리게끔 등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듯이 어디까지나 천지를 창조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명을 받은 그의 영(God;Spirit)들이란 것이고 비록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영(God;Spirit)들과 신(God;Spirit)의 세계에 대해서 이 땅에서 사명을 받고 증거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에도 있듯이 어디까지나 신(God;Spirit)을 만난 사람들이 처한 그 사람들의 한계와 더불어 그 사람들이 속한 시대 상황과 생활 문화와 여타 사람 사는 사회적인 한계가 있듯이 시대가 21세기인 만큼 조금은 합리적으로 이상적으로 생각을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을 비하 하자는 것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모든 사회적인 것들을 떠나서 사람이란 사실만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영(God;Spirit)들에 의해서 창조된 사람이란 사실만으로 사람 개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사람 개개인의 권익을 존중하고 사람의 개개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나아가 사람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신(God;Spirit)의 신(God;Spirit)이고 사람은 사람이고 신(God;Spirit)에 대해서 영(God;Spirit)이라고 하듯이 사람에 대해서 육체와 영혼이 있다고 하듯이 그리고 본인들이 비록 육체적은 감지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경험이나 체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조금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그리고 일백년의 삶 속에서 떠나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무엇에 대한 판단을 하든 너무 “신앙심”이란 말과 “경건함”이란 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극단적인 하나의 예로서 글이 없는 사회에서는 지금처럼 그리고 성경에서처럼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고 다른 예를 들어서 어떤 지역에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생각을 하고 있는 신(God;Spirit)이 나무나 돌이나 등 자연물일 때 그 때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영(God;Spirit)이 실체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특정한 사람을 통하여 기적이나 막연히 생각을 하고 있는 신앙의 형태를 나타나게 되면 당연히 사람들은 나무나 돌 등 본인들이 알고 있는 신(God;Spirit)이 능력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이고 조금 더 나아가 그 지역 사회에서 어린 아이를 통해서 그런 능력이 나타난다고 한다면 어느 사회를 불문하고 대체로 어른들이 알고 있는 개념의 신(God;Spirit)으로 생각을 할 것이란 것이다. 즉 산 속에서 누군가가 수도를 하고 있다가 천사(God;Spirit)를 만나서 사람 사는 세계 외에 다른 세계를 잠시나마 본인도 영문도 모르게 볼 수 있다고 가정을 하고, 지금까지 인류의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능력에 대한 결과가 그렇다, 그 본 것을 본인의 수도의 결과인 양 환희에 들떠서 늘 상 하듯이 여러 사람들을 모어 두고서 말을 하면 그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을 하고 생각을 할까? 아! 그 사람 “뭔가 깨달았다” “문리가 텄다” “득도 했다” “경지에 도달했다”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등등의 말들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다고 그 사람이 한 순간에 모습이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사람으로서의 실체가 잡혔다가 갑자기 허공과 같이 변하고 동에 번쩍하고 나타났다가 서에 번쩍하고 나타나고 지구에 번쩍하고 나타났다가 태양에 번쩍하고 나타나며 먹지도 않고 싸지도 않고 잠도 자지도 않고 더구나 죽지도 않으며 걸어 가다가 벽에 부딪혀도 그냥 통과가 가능할까?  


조금은 또 다른 경우로서 말을 하면, 특정한 사건이나 사고나 경우에 대해서 관련된 사람이 미래에 대한 예언을 흉내 내어서 또는 절대 권력을 흉내 내어서 미리 앞으로 어떻게 일들이 진행이 될 것이라고 말을 한 후 그 말대로 일들이 진행되게 만들기 위해서 전혀 다른 경우와 전혀 다른 상황에 대해서도 업무 절차를 꼭 같이 적용을 하려고 하는 경우들과 그 사유로 규정을 이유로 드는 경우들과, 때로는 그와 같은 경우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내부 규정들을 실제로 만들기도 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경우들과,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어느 경우나 사유나 목적이 무엇이든, 즉 누군가가 어릴 때 또는 군 복무를 위해서 입대를 한 때 있었던 일들과 한 말들과 더불어 약 20년 동안의 수많은 사람들의 협조와 노고로 그 사람의 현재의 처지가 우리 사회에서 무슨 일이든 일을 도모할 처지나 모양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제 나름대로 제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 실질적으로는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일들 자체를 비록 뭔가 일어나고 있다고 감지를 하고 느끼고 있지만 전혀 이해나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 비유로서 말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특히나 사회 전체적으로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조금은 지나친 경우가 아닐까 싶다. <<<



걷고 걸어서 성남시에 있는 대학교를 방문한다. 컴퓨터 운영실이 잠겨 있다. 방학 기간 중에는 학교 운영 시간이 조금은 앞 당겨진 모양이다. 다른 대학교들도 그런 곳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 같다. 아마도 값비싼 등록금으로 인하여 아르바이트 하로 간 학생들이 많으니 대학교 시설물 자체를 늦게까지 운영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 24시간 개방은 힘들더라도 최소한 18시까지는 개방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대학교뿐만 아니라 도서관 운영 시간 자체를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도서관을 찾을 수 있는 시간으로 맞추어서 조금은 우연하게(Flexible) 하게 운영을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는가 싶다. 다른 곳은 몰라도 도서관은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없으면 그 의미가 많이 퇴색이 되니 물론 중요한 자료와 책을 보관하는 의미도 있지만 가능하면 많이 방문을 할 수 있게끔 도서 대여를 위해서든 도서관 내의 시설물을 사용을 하기 위해서든 좋지 않는가 싶다. 그리고 시설물을 마치 중·고등학생을 위한 독서실처럼 만들지 말고 조금은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공간이 여유가 있게 만드는 것이 좋지 않는가 싶다. 그런데 근래의 독서 분위기나 근래의 사회 분위기를 고려를 하면 이런 말도 정말 무색하다. 아멘! <<<



대학교 앞 PC 방에서 필요한 문서를 작성을 하고 USB에 저장을 한 후 지하철역까지 걸어가서 - 대학교 정문과 지하역까지의 도로변 옆 공간은 지금 현재 공원처럼 되어 있지만 먼 훗날 임대용 연립주택을 일렬로 짓고 그 앞뒤로 산책로와 더불어 나무를 심는 식으로 바꾸는 것도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까지 가서 버스 1009번을 타고 수원시로 행한 하루이다.



>>> 도로 위를 걸어 가다가 도로 보다 높이 있는 지하철 역 입구에서 지하철 계단의 두 번째 또는 세 번 째 계단으로 바로 올라 갈 때 경우에 따라서 한 쪽 발은 계단에 닿은 채 한 쪽 발은 허공에 뜬 채 잠시 정지 상태에 있을 수 있는 나만의 묘기를 잠시, 우연찮게, 보인 날이기도 하다. <<< - 끝, The End, Das Ende -



2006년 8월 15일, 광복절에,



정 희득



야훼님(여호와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영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살아 있는 전지전능한 지혜와 끊임없는 축복이 늘 함께 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Yahweh's(Jehovah, The Lord, God, The Lord God; Spirit) and Jesus Christ's, His Spirit, Living Almighty Wisdom And Inexhaustible Blessings Be Always With You With All My He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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