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靈,Spirit)과 사명

선입견과 편견과 오해 2

정희득이본명이자가명 2007. 3. 2. 01:15

과거로의 회귀와 우려되는 현실

 

선입견과 편견과 오해 2

 

고등학교 때 두 친구가 논쟁이 붙었다. OSS란 친구와 LHW란 친구인 것으로 기억을 한다. 논쟁을 시작한 이유나 목적은 모르겠지만 얼핏 논쟁의 내용을 들어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재론적 차별 또는 신분 차별과 유사한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즉, 근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에는 존재론적 차별이나 신분적 속성의 차별이 있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한 서로 간의 앎과 견해 차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서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내용이 적용이 되고 묘한 뉘앙스가 적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논쟁을 하는 것을 보고 있는 중 깡패란 말도 나오고 칼잡이란 말도 나오고 그 시대의 관습이나 예법에 따른 표현들도 몇 마디 나온다. 특정한 누구를 또는 특정한 가문을 지칭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니고 과거에 우리 역사 속에서 누군가가 권력을 잡게 되거나 국가를 세우게 되거나 또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국가의 왕이 되는 과정을 현대 시대의 모습에서 비추어 보았을 때 친구들 사이에 논쟁 중 그리고 그 논쟁을 보면서 응원으로 언급된 말들이다. 나의 경우는 다른 요소가 전혀 개입된 것이 없고 두 입장 중에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본질적 또는 신분적 차별로 보는 것이 아닌 동등함 또는 평등 또는 존엄성과 자유를 강조하는 의견을 지원을 한 것이다. 그 상황이 근래에 반영되고 있는 TV Program인 X-Man의 진행 도중 누군가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일정 정도는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앞의 요지는 사람 사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왕족이니 귀족이니 평민이니 상민이니 천민이니 하는 것에 의해서 또는 직업에 의해서 또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람의 언행의 모습에 의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신분이 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의해서, 즉 대표적인 경우로서 왕족을 예로 들어서 말을 하면 누구나 왕족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의해서, 사람 간에 근원적인 차별이 있다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능력이나 재능이나 취미나 기호 등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가족 안에서도 차이가 있고 가문 안에서도 차이가 있다. 심지어 개인에게서도 시기에 따른 차이가 나타날 수가 있다. 영혼이 있다고 하지만 육체가 있는 사람이니 사람이 처한 환경에 의해서 사고와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고 그 결과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다른 모습들을 보일 수가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존재 자체에 있어서 차별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창조된 말이 다른 말이 아니고 사람이란 존재로서 창조가 된 것을 말을 하는 것이고 왕족, 귀족, 평민, 상민, 천민으로 나누어서 창조를 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직업을 비롯한 사람의 다양한 활동들은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살면서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지 사람이 창조가 된 존재하여 최초부터 신분적으로 차별인 존재가 되게 창조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한 사람들을 두고서 사람으로서의 본질적인 모습 자체만을 두고 볼 때 사람과 사람의 무수한 면에서의 차이를 논할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로서 신분적 차별의 개념으로서의 차별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의 하나 비교 당사자끼리는 태어난 직후부터 모든 조건이 동일한 상태에서 비교를 하여 말을 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교 자체가 또 태어난 직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멀리 볼 것 없이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가족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람과 사람의 무수한 면에서의 차이가 또 그 사람들이 속한 사회 환경과 연결이 되니 더더욱 그런 것이다. 비록 사람과 환경과의, 특히 사회 환경과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이 있지만 환경과 독립하여 사람의 존재론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 스스로의 모습을, 시간의 경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해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가족이나 가문이나 지역이나 민족이나 국가 등과 관련이 없이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고유한 모습을, 즉 재능이나 능력이나 특성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경우로서 왕족을 예로 들어서 말을 하면 그 당시 언급이 된 단어 중 하나인 왕족 안에서도 차이가 있다. 최초에 누군가가 어떤 경로에 의해서 왕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 동일한 환경에 처할 경우에 왕이 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왕이 될 수가 없다고 하여 또 최초에 왕이 된 사람과 그 사람의 그 후손만 창조적 본질이 다르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왕이 되는 과정이나 경로를 떠나서 최초에 왕이 된 사람의 부모와 그 조상들은 다른 왕 밑에서 또는 다른 사회에서 왕이 되지 못한 채 살았던 것이니까 혈통이나 종족이란 차원에서 보면 누군가가 최초에 왕이 되었다고 해서 최초에 왕이 된 사람과 그 사람의 그 후손만 창조적 본질이 다르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특히 왕이 되는 과정을 보면, 예를 들어서 우리의 역사 중 가장 가까운 조선 시대를 보면, 어느 정도 문무를 겸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사적인 요소에 의해서 왕이 된 것이니 더더욱 그럴 것이고 이것저것 떠나서 달리 보면 최초에 왕이 된 사람만 그 시대의 환경에서 왕이 될 수 있는 능력이나 자질이나 기질을 타고 태어난 것이라고, 조금 더 정확하게 말을 하면 기묘한 유전적 특질 중에서 최초에 왕이 된 사람만 그 시대의 환경에서 왕이 될 수 있는 능력이나 자질이나 기질이 발현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유전적 요소가 형성이 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본질적인 차별이 존재를 한다고 말을 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궁궐에서의 생활이 그 당시 세금을 바탕으로 비록 화려하고 우아함을 유지 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사람으로서의 지켜야 할 도리라는 면에서는, 때때로, 그리고 일부분적인 모습이지만, 주지육림으로 대표되는 것도 있었고 특히 남녀 관계를 살펴보면 여자와 태어나는 자녀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삶이나 존재론적인 고려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는가 싶다는 것이다. 국사 및 권력의 암투와 관련된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궁궐 생활만을 보았을 때 왕비와 궁녀들의 모습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범죄적인 행위는 지금 시대에서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들이 많지 않았던가 싶다. 그러니 대표적인 경우로서 왕족을 예로 들어서 말을 하면 왕족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비록 몇 가지 외형적인 특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본질적인 차별이 존재를 한다고 말을 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꼭 과거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그 당시의 직업에 따는 사람의 생각이나 사고나 활동에 차이가 나타나 보이는 것도 사람이 처한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되는 모습의 반영에 의해서 사람의 언행의 귀천이란 것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지 그 가체가 사람의 존재적 본질의 차별을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적인 차별이 아니라 환경적인 요소이든 또는 개개인의 재능이나 기질이나 성격이나 특성이나 능력 등에 의한 것이든 무엇을 어떻게 생각을 하고 또 행동을 하고 또 생활을 하는가에 따라서, 특히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서, 또한 사회적인 활동의 한계나 제약들과 더불어서, 나타나게 되는 모습들의 차이란 것이고 그런 모습들이 당대에서만도 태어나서부터 사망할 때까지를 고려를 하면 늘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고 또 각각의 가정에서의 모습을 보아도 모두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차에 의한 것과 무엇보다도 환경의 차이에 의한 것으로 개개인의 정신적 및 언행의 모습이 달리 나타나 보일 수 있는 것으로 비교 당시의 모습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존재적 본질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스스로의 무한한 변화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또 사람이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또는 여타 지식 및 사회적인 영향을 통해서 변화 가능성이 있는 존재란 것을 부정을 하는 것이고 나아가 발전으로 보던 퇴보로 보던 또는 사람과 사람의 삶이란 관점에서 보던 인류의 역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앞의 사실을 설명을 하기에는 단편적인 요소이지만 일례로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차마 입에 언급하기 힘든 방법으로, 법의 존재 이유가 되는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샐러리맨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을 하고 그러나 인격적인 모습 및 여타의 사람으로서의 재능이나 능력이나 자질이나 여타의 사회 활동의 모습은 또 반대의 경우가 있다고 가정을 한 후 사람 사는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습들에 대한 말을 한 때가 있었다. 앞의 예가 보편적인 것은 아니지만 몇몇 경우나 상황을 고려할 예로서 언급이 되고 일부는 과거 시대의 신분적인 차별과 관련하여 언급이 되기도 한다.

 

근래에 집중된 경제력을 무기로 또는 그를 바탕으로 한 조직력을 무기로 또는 여타 현대 사회의 활동들을 무기로 과거의 사람으로서의 존재적 말살이나 자유로운 정신적 사고의 마비나 자유로운 창의적 사고의 세뇌와 같은 시대로 가려고 하는 우려할 요소들이 많이 나타나 보이는 것 같아 몇 마디 하게 된다. 하나의 예로서 열우당과 관련하여 민주주의를 언급을 했듯이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 지식의 누적 및 발달과 더불어 온갖 현학적인 말들이나 외형적인 모습들만 난무를 하지 실질적인 개개인의 변화가 없는 것이 우려가 되듯이 지금 시점에서 그 사유나 이유가 무엇이든 조선시대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과거로의 회귀의 시도는 또 하나의 암울함 무덤과 같이 될 것이란 것이다. 사람을 특정하게 제한되고 고정된 모습으로 보자는 것과 특히 사회 공간이나 제도를 그렇게 만들고자 하는 분위기가 나타나 보이는 것 같아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조금 언급을 하게 된다.

 

향후의 우리 사회에 적합한 사회 구성체나 정치 체제를 논하기 전에 우선 시급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시대를 따라 전이되고 돌연변이 되고 있는 그래서 실질적인 조직원이 누군지도 잘 구별이 되지 않는 찬물파와 송충이파도 그래서 식별이 가능한 꼬리를 감춘 채 이제는 우리 사회의 분야와 계층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는 찬물파와 송충이파의 계파나 계보 해체도 그 중의 하나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 TEN Production 영화 시나리오 작성 중 -

 

2007년 2월 24일

 

정희득

 

덤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나고 오후 및 저녁에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남아서 하는 자율학습시간이면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P라는 친구가 있었다. 정말 열심히 살고 싶어 하는 친구였다. 무엇이 그 친구를 고뇌케 했는지 몰라도 공부하는 모습이나 생활 스타일로 보았을 때 성실하거나 근면한 것을 떠나서 정말 열심히 살고 싶어 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저녁 시간이면 한동안, 아마도 몇 개월은 되었을 것이지만, 학교 운동장을 달리기에 학교 학생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나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이 공부를 아무 말 없이 하듯이 그냥 좋아서 달린단다. 구체적인 이유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그 중의 하나는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려서 가슴이 파열이 되던지 그렇지 않고 살아남는지 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이 전부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추측이지만 무엇인가가, 즉 그것이 미래의 삶에 대한 표현이든 그 당시 추구하고 싶은 것에 대한 표현이든, 그 친구를 옭아매는 것이 있었지 않는가 싶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우연히 삶과 삶을 지탱해주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을 때 말을 나눈 것이 비록 표현이 다른 신앙인과 같지는 않았겠지만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지금 글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오래된 이야기이고 학창시절의 지나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 그 친구는 기억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관련된 글을 쓰다 보니 기억이 나는 부분이 있어서 조금 언급을 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또 그런 현상이 생긴다. 자율학습 시간이면 밤마다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L(또는 N)이란 친구가 있었다. 얼마나 잘 달리는지 천 미터 달리기를 하다가 실신은 할 번한 나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기묘한 현상이라 한 동안 넋을 잃은 듯이 창밖을 보고 있다가 감탄을 하고서는, 아마도 그 때 비록 어둠 속에서지만 아프리카의 세계 신기록 보유 마라톤 선수와도 잠시 마라톤 시합을 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잠시 정신을 가다듬으며 얼굴을 돌릴 사이에 벌써 교실 안에까지 와 있다. 그 친구를 밤마다 학교 운동장을 달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유에 대한 대답은 없다. 나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이 공부를 아무 말 없이 하듯이 그냥 좋아서 달린단다.

 

지금 현재의 글에서 언급이 되지는 않았지만 국민학교 때 내가 전학을 오기 전 나의 고향의 덕명국민학교 앞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사진 촬영을 할 때 있었던 말들처럼, 특히 친구들과 사진사와의 사이에 있었던 말들처럼, 그리고 부산시로 이사를 간 후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도중 마치 나에게 유언을 남기듯이, 그리고 내가 아닌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한 감정이 담긴 말을 한마디씩 남기듯이, 몇 마디씩 말을 하고서는 반을 옮긴 것인지 또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것인지 또는 우리 사회에서의 삶의 모습을 일부 반영한 것으로 자퇴를 하고 일찍부터 경제 현장에 뛰어 들어 다른 삶의 길을 모색을 한 것인지 몰라도 앞과 유사한 경우들이 제법 있었다. 대학교를 다니는 기간 동안에도 그리고 군복무를 하는 기간 동안에도 내가 학교를 가기 위해서 또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또는 여타의 생활과 관련된 활동을 하기 위해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을 하는 것처럼 이곳저곳에서 활동을 할 때 비록 누구며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간혹 마치 스쳐지나가듯이 들리는 말이 ‘작업 대상’이란 말과 그 작업이 무엇을 하는 작업인지 몰라도 보호세력이나 비호세력이 있는 것처럼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대학교 졸업 후 교직 생활을 할 때 및 사회 생활을 할 때도 비슷한 경우들이 간혹 있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증오 섞인 말들의 듣게 된다. 황당해서 무슨 말인지 대화를 하려고 하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 다음에 공통적으로 하게 되는 말은 ‘잘 못 알았다’는 말이다. 무엇을 잘 못 알았는지, 누구를 위해서, 또는 무엇을 위해서, 이곳저곳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단순히 스쳐 지나갈 사실로 발생 할 수 있는 그런 언행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나 사유를 알 수가 없었지만 그리고 내가 그 이유나 사유를 알 수 있었다고 해도 해결을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지금까지의 나의 장황한 글들 중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현상과 관련된 일부 모습들이 그 사유를 일정 정도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앞과 같은 상황들 중 아주 가끔 왜,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란 말도 듣게 된다. 그 당시에는 전혀 영문을 모르니 그리고 굳이 어릴 때를 비롯한 과거의 일들을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서 상기 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 달리 무엇이라고 말을 할 것도 없었고 다른 글에서 언급을 했듯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기억을 할 수 있기로는 사람들이 이해를 할 수 있게 쉽게 설명을 하기가 힘들지만 어릴 때 있었던 일들로 인하여, 즉 대표적인 이유로 내가 한 말들을 바탕으로 누군가가 가끔 시험을 하고자 하니 경우들이 있으니 그런 일들이 나를 힘들게 할 것과 더불어 그 당시까지만 해도 정치를 하고자 하면 세상사의 이런 일 저런 일을 많이 겪게 되고 때로는 곤욕 아닌 곤욕을 치를 수도 있으니 정확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나의 인지 및 기억의 메카니즘(mechanism)만이라도 매일 매일이 나에게 새롭게 인식이 될 수 있게끔 하고자 하여, 나에게 발생한 나의 기억의 특성상 거의 매일 같이 또는 자주 반복되는 일이 아니면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 마치 기억이란 저장소의 저편에 또는 깊숙이 저장이 되어 있는 것처럼 저장이 되어 있다가 먼 훗날 때가 되면, 즉 나의 나이 마흔 정도가 되었을 때, 글을 쓰는 것을 비롯하여 내가 해야만 할 일들을 할 수 있기 위해서 나의 어릴 때 및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즉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세계의 능력에 의해서 자동으로, 저절로, 기억을 할 수 있게 되겠지만 혹시나, 어린 나의 사람으로서의 입장에 의한 것으로 만약에, 나의 나이 마흔 정도가 되었을 때 내가 해야 할 것들을 기억을 하지 못하게 되면 내가 나의 기억들을 되찾을 수 있게 그래서 내가 해야만 할 일들을 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말을 한 것으로 인하여 과거에 내가 했던 말이나 나에게 있었던 일이나 나에게 발생한 사건 사고를 언급을 한다고, 또는 과거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맞는가 하는 것을 찾는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앞의 사실들과 더불어 간혹 들리게 되는 말이 있다. 그리고 말을 한 당사자에게 확인을 해도 다른 말을 하게 되거나 또는 그 당사자도 영문을 모르고 사과의 말로서 끝나니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을 말이기도 하다. 나의 부모님은 부산에 살고 계신다. 그런데 나는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서울시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한 1984년도 이후 3년 동안의 군 복무를 위한 논산시나 평택시나 의정부시에서의 기간과 최근 3-4년 전부터의 수원시에서의 주거를 제외하면 지금 현재까지 서울시에서 살았는데 나의 활동 공간에서 나를 대상으로 한 언행의 이유로 나에게 간혹 들리게 된 나의 부모님과 가족은 누구를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더불어 최근 몇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은 아마도 1986년도 이후의 나의 삶에 있었던 이런이런 언행들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재현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할 수 있는 언행이지만 경우의 수를 볼 때 그리고 상황과 연계된 언행을 볼 때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우연이 아니면 이유나 목적이 무엇일까?

 

‘환영과 동영상과 영의 존재와 그 능력’이란 글에서처럼 나를 통한 또는 나와의 대화를 통한 연기 연습이나 연기 경력을 쌓기 위한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의 하나는 아닌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것을 통해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즉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이, 창조된 사람과 그리고 그 이후 사람과 사람을 통해서 태어난 사람들의 의사와 관련 없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창조를 하신 것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의사 표현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사람의 삶이 단순해 보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 수없이 많은 사실들이 혼재 되어 있으니 피아를 구분하기 힘든 상황에서 누구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을 하는 것은 아니고 그리고 지금 상황에선 공허한 메아리 같이 될 수 있는 말들로 특정 누구에 대한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아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듯이 지금까지의 나의 삶의 의도나 목적과는 전혀 관련 없다고 하더라도 나도 그 상황 속에 속하게 된 한 명으로서, 즉 누군가가 특정한 목적으로 광화문 사거리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과정 중 불특정 다수의 행인 속에서 사진 촬영을 하게 되어 전후 사정을 모르는 불특정 다수가 때때로 그 사진 속의 구성원 중 한명이 되듯이, 단지 사안의 경중이나 의도나 목적을 떠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이 도모되고 진행이 되고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말이 아닐까 싶다.  - The End, Das Ende,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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