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Politics)와 사명

신앙심과 밥에 대한 이야기

정희득이본명이자가명 2007. 5. 11. 17:58
 

신앙심과 밥에 대한 이야기



- '믿거나 말거나' 아래의 글을 약 3-40년 당시의 시골에서 있었던 일로 입학 연령보다 조금은 일찍 입학을 한 학생의 초등학교 5학년 이전에 발생한 것들에 근거를 하는 것이 많으니 혹시나 이 글을 접하게 되는 분들이 시비 거리에 휘말리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믿거나 말거나' 라고 말을 하는 것은 글의 내용이 거짓이거나 허위라는 뜻은 전혀 아니며 단지 실존을 하고 있는 우주 만물에 대한 실질적은 영향이나 결과를 미치지만 존재의 속성이 사람의 인지 능력을 초월하여 존재를 하는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고 선택된 사람과의 동행이나 텔레파시나 교통 등 관계도 사람의 능력 보다는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의, 실존과 그 세계와 사람의 사후 세계에 대해서 말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나타나는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의, 능력에 의한 것이며 그러한 결과 사람과 사람이 공존하고 있는 공간에 존재를 해도 모두가 인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선택된 사람만 인지를 할 수 있는 경우가 되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각종 각색의 현상들에 대한 서로의 입장 차이가 명백하게 존재를 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믿음이나 신앙심 자체가 성경(The Bible)에서도 선지자님들과 그리스도 예수님(Jesus Christ)과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강제할 일이 아니고 각자에게 달린 문제인 바 말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실제고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그리고 실질적인 경험과 체험을 바탕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말을 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에 대한 표현 널리 양해 바랍니다. -



아래의 말들은 종교인들을 시험 들게 하자는 것은 아니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종교의 종류에 관련 없이 현세든 내세든 구원과 평안과 복을 구하고자 하는 종교가 가끔 종교 행위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시험 들게 되는, 특히 근래의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세상의 복잡다단함을 바탕으로 이익사회로 변질 되는 종교 행위에 시험 들게 되는, 경우들에 대한 글이다.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의 신앙과 가족이나 자녀의 신앙이나 신앙심은 어떨까?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전혀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의 신앙심은 최초에 믿음이 생긴이후부터 계속 불변하고 있을까? 아니면 삶을 살아 가는 과정 중에 고난이 닥치고 위기기 닥칠 때 또는 신앙심으로 너무 충만할 때 등등 경우에 따라서 매일은 아니지만 우여곡절을 겪게 될 수도 있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개인적으로 모르니 몰라다, 설교 하시는 말씀을 보면 그리고 목사님이나 선교사가 되기 전의 과정을 보면 무엇보다도 사람이 성장하고 변화 하는 과정을 보면 항상성의 것은 아니고 믿음이나 신앙심 자체는 변하지 않겠지만 그 정도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나 신앙심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어릴 때도, 즉 세상 물정을 모를 때도, 아이가 아는 바를 알 수 있는 것까지, 즉 아이가 경험하거나 체험하는 것을 경험하거나 체험하는 그대로, 말을 해도 그 말 자체가 말을 하는 상황에 따라서 달리 이해가 될 수 있듯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세상 물정이나 세상의 관습이나 세상의 지식이나 종교 및 신에 대한 개념 등으로부터 거의 무지한, 그러나 각자의 경험이나 체험이나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어린 아이가 사람 사회의 이해관계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기만이란 말을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가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을 또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어도 마음을 보여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어떤 현상들이 생길까? 신앙이나 신앙심에 대한 나름대로 척도들을 만든다. 그 다음에 무슨 일들이 생길까? 종교와 관련 없는 행위들이 발생을 한다. 믿음이 믿음을 괴롭히고 신앙이 신앙을 괴롭히고 교인이 교인을 괴롭히는 현상이 생긴다. 대체로 산업화가 진행이 되고 근대화가 진행이 되면 성경에 대한,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세계 및 사람의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전도가 잘 된다. 누구나 막연하지만 신의 세계와 사람의 사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있는 편이니 종교를 가지려고 하고 성경이 사람의 생활 속에서의 언행에 대한 것으로 십계명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말이나 사람의 말이 아니고 신의 존재와 신의 세계와 사람의 사후 세계가 존재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말이고 증거를 하는 것에 대한 말이니 자연히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이 증가를 한다.


그러다가 점차 그 증가 속도가 멈추어진다. 왜 그럴까? 성경이 거짓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신앙 생활 자체가 그렇게 힘들어서도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왜 그럴까?


산업화와 근대화가 진행이 되면 나타나는 외형적인 변화 중 두드러진 것은 무엇일까? 사람의 지식이나 과학 수준이 증가를 한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사람의 지식으로 많이 채워지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지식으로 많이 채워지게 되면 자연히,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상가나 이념주의자처럼 사람의 지식에 사람 스스로가 지배를 당하는 모습도 나타나게 된다. 그런 것에는 꼭 사상이나 이념뿐만 아니라 예술을 비롯한 각종 창작 활동을 비롯하여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각종의 정신적 물리적 산물이 모도 포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완전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의 자유로운 모습에서 그래서 끊임 없이 무엇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모습에서 특정한 틀에 묶이게 되거나 구속이 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고 정도의 차이도 천자 만별이지만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 안의 모습 중에서 보면 성경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경도 표현은 사람의 언어로 되어 있으니 성경을 읽거나 암기를 하거나 하는 과정 중에 그런 모습들이 사람들을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신앙심을 통해서 나타나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현학적인 표현들이나 모습들이 많다. 말과 말로서 서로 시간 소일하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에는 끝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매일 침이 마르고 닳도록 말을 해도 내일 되면 또 할 말이 생기듯이 사람의 기억의 특성이 일부 그렇고 그만큼 사람의 삶이 계속적으로 시간이란 것과 더불어 흘러가는 것이고 비록 사람의 눈에 감지는 되지 않지만 매 순간 순간 사람 자체도 성장을 해 가고 있다는 것이고 또 언어가 가지는 마력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실제 믿음이나 신앙심이나 신앙 생활과는 관련이 없는데 말과 말에 의해서 고귀함과 고상함과 우아함과 현학적인 모습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과거 2,000 년 전처럼, 성경에 언급이 되지 못한 수많은 경우들처럼, 사람들이 성경의 성경이라고 하는 것과 믿음과 신앙심과 신앙 생활이라고 정의를 하고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수 십 년 동안 검증된 신앙심에 대한 기준표가 있는데 어느 날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타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존재를 하고 있는 영(사람의 영혼과는 다른 존재임)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고 동행하는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천사들에 의해서 갑자기 신의 존재와 신의 세계와 사람의 사후 세계에 대해서 말을 하고 기적이라고 불리는 능력들을 일으키니 그것도 성경의 성경이라고 하는 것과 믿음과 신앙심과 신앙 생활이라고 정의를 한 것들에 대한 계보도 없고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공인 받는 사람도 아닌 사람이 느닷없이 그런 모습을 보이니 성경에 있는 내용 중 마귀나 악마가 되게 되거나 아니면 사람의 모습으로는 사술을 부리는 것으로 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 이전의 성경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현상들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습들이 성경을 두고 그리고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천사들을 두고 그리고 사람의 사후 세계를 두고 그리고 구원의 문제를 두고 사람이 만든 말이나 지식에 의해서 사람이 지배를 당하게 되니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습이 정확하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말이나 지식에서 일정 정도 자유로운 층에 있는, 즉 사회적인 신분 계층을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상태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인정이 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학문 분야에서도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면 그 분야에서도, 특히나 형이상학적인 분야나 예술의 분야와 같이 물리적으로 말을 하기 힘든 분야에서도, 간혹 나타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또한 앞의 요인에 따라서 물질적인 풍요가 증가를 하고 그에 따라서 비록 성경에 기록된 형상, 동상, 우상은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여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 물질 문명이, 또는 물질 문명으로 파생된 것들이, 많이 생긴다. 


더불어 다른 무엇보다도 앞의 변화 요인들에 비해서 교회에서의 변화가 본질적인 모습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방향으로 가게 되면서 발생이 되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믿음이나 신앙심의 문제도 아니고 성경에 대한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그 방향이 성경의 선지자님들이 행하던 모습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이 행하던 모습에서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행하던 모습에서 점점 멀어지고 교회 내부가 계층화 되고 물리적으로 변화는 모습들에 부속이 되는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약 3-40년 전 나의 어릴 때이니 요즈음의 믿음이나 신앙심에 비교할 바가 전혀 못 된다. 즉 비록 영어 성경, 러시아어 성경, 중국어 성경, 독일어 성경, 한글 성경 등등을 알게 되면 표현을 하게 되는 성경 구절을 몇 마디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물론 그것도 사람으로서의 나의 능력이 아니고 성경이 자기들에 대한 말이라고 말을 하는 나도 알지도 못하는 invisible inaudible intangible and so on한 존재들의 능력에 의한 것이고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자그마한 백과 사전과 더불어 성경의 내용을 미리 내 머리 속에 입력을 시켜 달라고 말을 했지만 실제로 내가 나의 두뇌나 입으로 말을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모르고 성경 구절도 한 구절도 모르고 교회도 모르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도 모르고 등등 성경이나 교회와 관련된 것을 일절 모르는 상태이니 요즈음의 믿음이나 신앙심과 비교할 바가 전혀 못되고 특히나 걸음마 때부터 성경 구절로서 말을 하는 근래의 몇 대 째 신앙심이나 여타 공인된 신앙심들로 구성된 신앙심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고 그러니 오히려 성경과 교회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귀신이나 마귀나 악마의 경우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전혀 개의치 않은 말들이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로서 기록을 한다.


누군가가, 물론 나도 그럴 것이지만, 내가 우리 사회에서 신이나 영이라고 말을 하는 또는 하늘이라고 말을 하는 것과 관련된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니 믿거나 말거나 재미도 있고 하여 사람 사는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적인 신분이나 직위나 직분 등에 대해서 그리고 종교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 알고자 하여 말을 하게 되었을 때 있었던 말로서 교황(Pope)에 대해서 밥에 비교한 사실 관련해서 유태인(Jew)에 대한 것을 사람이 먹는 밥(meal)에 비교하여 밥(meal)은 밥(meal)으로서 같은 밥(meal)인데 잘 된 밥(meal) 같은 밥(meal) 덜된 밥(meal) 등에 대해서 말을 하고 또 밥(meal)이 늘 같은 밥(meal)이 아니라는 말도 하고 등 신앙심에 대한 것을 그리고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천사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을 말을 할 때 또 달리 언급이 된 말이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대해서 묻고자 할 때 밥(meal)축에 들어가지도 않는 밥(meal)에 대한 말을 한 일이 있었다. 세상 물정이나 세상 관습이나 세상의 지식이나 종교 및 신에 대한 사람의 개념 등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물론이요 사람에 대해서도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회적인 신분이나 직위나 직분 등에 대해서 모르고 신앙심이란 것도 모를 때 누군가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물을 때 밥(meal)축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밥(meal)이란 말을 했다. (물론 밥(meal)이란 단어로 표현을 하게 된 것은 누군가가 밥(meal)이란 말로 표현을 해 줄 것을 부탁을 한 것은 맞으나 그 의도도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가끔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에 대해서, 말을 할 때 그 존재 자체 invisible, inaudible, intangible, and so on 하고 또 그 당시 나의 고향에 직접적인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서 전래되는 것이 없으니 너무나 막연하고 추상적이니 그런 말이 언급이 된 것이지, 즉 나의 경우를 두고 고향 사람들이 가끔 이 세상의 종교에 대한 것들을 알아서 오는 것을 내가 제비가 무엇을 물고 오는 것에 비유하여 '무엇을 물고 온 것이 있는지' 하는 표현을 썼듯이 그런 사유에 의한 것이지,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비록 인지 능력이 있고 지각이 존재를 하지만 사람이나 사물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나 구분이 없이, 유형 무형에 대한 개념이나 구분 없이,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개념이나 구분이 없이,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나 구분이 없이, 나아가 사람의 말과 언어와 개념으로 표현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명확한 개념이나 구분은 없이 등등, 그냥 항상 나와 더불어 존재를 하고 있는 것으로서 우주 만물과 무형의 것과 나에 대한 경계나 구분이 없이 어떻게 보면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혼돈 그 자체의 상태에서 내가 경험과 체험으로 알게 된 것을, 즉 최초 내가 기저귀 차고 누워있을 때의 시기부터 나의 집의 방안에서부터 시작되어 내가 걸음마를 할 수 있을 시기까지 나에게 또는 나 안에 존재를 하고 있는 경험과 체험을, 그 경험과 체험의 연속선상에서 다른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과 항상 대화가 발생하고 이어지는 그대로 말을 하다 보니 전혀 반응이 없었고 대체로 나만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물론 나도 모르면서, 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혹시나 장난이 아닌가 싶어 이런 저런 방법으로 알게 모르게 확인을 하니 정말로 다른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었고 비록 사람의 인지 능력이란 관에서 볼 때 invisible inaudible intangible and so on 한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와, 나만 항상 대화나 신령한 교통이나 텔레파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내가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에 대해서 나에게는 항상 존재 하는 존재이고 대화나 신령한 교통이나 텔레파시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다른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려고 하니 그 존재의 invisible inaudible intangible and so on 특성이란 것에 기인을 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세상 물정이나 세상의 관습이나 세상의 지식이나 불가사리 예법이나 예의로 인하여 특히나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인하여 그리고 사회적인 이익이나 이해 관계의 연결 고리로 인하여 정당성이나 당위성을 떠나서 무척 어려움을 느꼈고 사람들의 반응도 가지각색인 것을 느꼈던 바 비록 밥(meal)이란 말과 관련되어 일어날 현상에 대한 피부로 실감하는 실질적인 또는 현실적인 감(Feeling)은 없었지만 교황이나 유태인이나 신앙이나 신앙심과 관련하여 만약에 밥(meal)이란 말로 비유적인 표현을 하게 되면 그 사람들이 아닌 그 사람들과 관련된 또는 그 사람들 중 몇몇의 누군가로부터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지만 사람으로서의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나의 존재와는 별개로 또, 믿거나 말거나, 성경에도 각자가 각자의 삶을 사는 동안 각자가 행한 대로 사후에 사후의 세계에서의 그 결과가 달라질 것이란 말도 있지만 사람들이 나의 말을 어떻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언행을 하는 것은 강제의 문제는 아니고 각자에게 달린 것이겠지만 내 안의 나의 사명으로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하는 것이므로 사람들에게 말을 해야 할 것은 해야 하는 바 밥이란 말로 신앙이나 신앙심이나 또 그와 관련되어 세상에서 공인된 것으로 알려진 직분이나 사람들에 대해서 나도 알지 못하는 말로 몇 마디 말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한 것의 중요한 의도는 내가 나에게 나타난 신체적인 현상들과 특히 매우 바쁘거나 분주하거나 무엇인가에 집중할 때의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순간적인 망각의 경우가 발생하는 것과 비슷한 나의 기억의 특성으로 인하여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나에게 일어날 일들을 잊는 것이 걱정인 된 바 먼 훗날 지금처럼 글을 쓸 때를 위해서 기억을 되살릴 때 도움이 되기 위해서 말을 한 것이 더 큰 것이었고 내가 한 말을 바탕으로 그리고 사람들의 막연한 피상적인 개념이나 관점에서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싶은 방법이나 방식으로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2001년 8월의 그 날에 어디선가 들려 오는 바에 의하면 그리고 컴퓨터 간에 마치 대용량 파일로 데이트가 전달이 되듯이 나의 어릴 때의 경우처럼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로부터의, 나에게 약 40년에 걸쳐서 또는 약 20년에 걸쳐서 발생한 현상들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 전달이 된 것으로, 물론 그 날 이후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시점까지는 대체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또 일시적인 망각의 상태에 있었겠지만 나이 마흔이 지난 지금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판단을 할 때 그 일로 인하여 몇몇 사람들로부터 기획되고 계획된 고문 아닌 고문이나 시험 아닌 시험을 당하게 된 원인들 중의 하나가 싶다. 내가 어리고 또 어릴 때 실질적으로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믿거나 말거나 성경에서 증거를 하고 있는 존재들과의, 경험이 있었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었겠지만 나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인 말과 관련된 것으로 인하여 나의 존재 자체가 나의 사명과는 별개로 또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사회적인 이해 관계에 얽히게 되니 그런 말을 바탕으로 시험대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신앙과 관련된 것이니 몇 마디 언급을 하면 과거 약 2,000년 전 유태인 사회에서도 신앙심 충만하고 각자의 행위에 충실한 제사장님이나 서기관님이나 장로님들과 그리스도 예수님 사이에 문제가 발생이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신앙심에 대해서 인지 능력 한계의 사람의 시각이나 관점에서의 어설픈 개념이나 정의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또는 다른 사람의 신앙심을, 판단하고 단죄를 하는 말을 누군가가 계속적으로 만든 것에 기인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경멸하거나 무시하거나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이고 단지 신앙심 자체에 대해서 앞에서 언급이 된 것과 같은 기준으로 그리고 그 당시 우리 사회에서의 사회적인 무엇으로, 즉 사람이란 독립된 존재로서의 본연의 무엇이 아닌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에서와 같이 사회적인 것과 연관된 무엇으로, 알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밥(meal)의 기준이 이것저것 모든 것을 벗어 버린 사람으로서 무엇을 생각을 하고 무엇을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을 하는가 하는 것에, 즉 사람의 언행이 사람의 삶과 연관이 되니 간단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교적 간단하게 표현을 하면 사람과 관련된 개인적인 것 가족적인 것 사회적인 것 등등 온갖 것과 관련 없이 얼마나 성경(The Bible)의 십계명의 기준에 맞는 삶인가 하는 것에, 즉 순수하게 죄의 기준에 대한 것에, 대한 것이었는데 아마도 아주 아주 벽촌의 시골에서 아는 것도 없는, 즉 모르는 것 많다는 것 외에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어린 아이의, 입을 통해서 때때로 사람의 말로 나타나게 되는 말이, 물론 그 중에서는 사람과 같이 말과 말에 의한 장난도 있고 사람이 나를 당황하게 하는 것도 있지만, 때때로 다른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심기가 불편하게 하거나 하는 경우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말에 덧붙여서 하게 된 말이 있었다. 나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가 되게 된 것 같아서 그 말에 덧붙여서 하게 된 말이 있었다. 무슨 말이었을까? 그런데 그 말이 또 영의 세계, 즉 신의 세계와, 즉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세계와, 사람의 차이로 인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개념과 결부된 귀신이나 마귀나 악마의 존재로 보이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비록 어리지만, 내가 말을 하게 된 사람들을 볼 때 개개인 사람들 자체는 선과 악의 개념이 별로 없는 것이고 단지 무슨 기준에 따라서 어떤 틀에서 따라서 움직여지고 지배되고 있는가 하는 차이가 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어릴 때의 경우 무슨 말이나 행위도 인정이 되지 않으면서 그런 말은 또 어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이 세상 물정이나 세상 관습이나 세상 지식의 기준이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만나고 교통하고 텔레파시가 통하고 동행을 하는 존재 및 그 존재와 관련된 것과 관련이 없이, 즉 내가 말을 하고자 하는 것과 관련 없이,


1). 내 안의 나에 대해서 하늘에서의 모습이, 즉 내 안의 나의 사람의 몸에서 벗어났을 때의 모습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종교 교주 중 이슬람교의 마호메트와 성격이나 스타일이나 특성 상 유사하다고 한 말은 사람들의 편리상 또는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종교나 신앙의 모순된 개념상 또는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신의 모순된 개념상, 즉 명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막연한 절대적 존재와 그 세계로서의 하늘에서의 일을 물으면서 우리 사회의 사람의 영혼에 대한 인식과 사람의 사후 영혼이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서 신에 대한 것을 눈에 보이는, 즉 유한한, 즉 생사가 모습이 보이는, 사람의 존재를 신으로 생각을 하는 것과 유사한 모습상,  인정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2). 또 내가 비록 어린 나이지만 나의 경험과 체험을 바탕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에 의해서 오늘과 같이 글을 쓸 것에 대비하여 나에게 나타난 여러 현상들을 바탕으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를 하는 과정 중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스님이 이것저것 트집 잡는 것 없이 대화를 하기에 제일 편하다는, 그래서 제일 된 사람이라는, 말은 또 스님의 존재 자체가 그 당시 우리 사회에서는 인정이 되고 있는 존재였으니 인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즉, 다른 글들에서 말을 한 것과 같이 부처님이나 임금(왕)님이나 여타의 경우들 모두가 사람들로서 내가 말을 하는 존재와는 다르다고, 즉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말을 하는 존재들과의 실질적인 경험이나 체험이 존재를 하지 않고 또 지식이나 이론이나 논리로 명확하게 아는 바가 없으니 나의 말들 중에서 자신들이 아는 것과는 연관이 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2001년 8월의 그 날에도 들려왔듯이 내가 한 말들을 바탕으로 앞과 같은 현상들이 나타난 것과는 달리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실존에 대해서 그리고 그 세계와 사후 세계에 대해서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즉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몸에 거하여 증거를 하듯이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사람 사는 사회가 다르고 세상의 관습이 다르니 동일한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라도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이나 이해 하는 것이 다르니 그 방법도 다르니 그와 같이 또는 그와 유사하게, 증거를 할 것이라고 말을 하니 다른 것은 몰라도 그리스도 예수님이 약 3년 반에 걸친 전도 활동 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듯이 2003년 중반부터의 약 3년 반에 걸친 나의 활동 후에 나를 사회적으로 매장을 하는 것은 할 수 있다는 말도 들려 왔듯이 동일한 현상을 두고 그것도 대한민국이란 울타리 안에서 발생한 일을 두고 그것도 약 40년에 걸쳐서 발생을 하고 있는 일을 두고 목적이 무엇이고 무엇에 홀렸는지 몰라도 그런 식으로 반응이 나타난다.


그런데 조금 더 재미 있는 것은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과의, 경험이나 체험이 그리고 '내 안의 나'의 존재가, 즉 어떻게 보면 사람이란 존재나 사람 사는 세상과는 전혀 관련 없고 사람 안에 사람의 영혼이 존재를 하듯이 그렇게 존재를 하는 것 뿐인데, 그것도 우주에 단순히 만물의 영장인 사람만 존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인지 능력을 초월하여 존재를 하는 절대적인 존재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존재를 하는 것 뿐인데, 그런 사실이 대한민국의 정치 활동과는 무슨 연관이 있다고, 즉 믿거나 말거나 사람으로 언행으로 나타나는 외형상의 현상으로 보면 정치인 누구나 종교 활동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데 대한민국의 정치 활동과는 무슨 관련이 있다고, 성경(The Bible)의 내용을 빌미로 정치 활동도 '창조'를 통해서 하고 생계 유지를 위한 활동도 '창조'를 통해서 돈이나 물질도 창조를 통해서 해결을 하고 여타 각종 활동도 '창조'를 통해서 하라고 더불어 도움이 필요하면 사람이 아닌 또는 돈이 아닌 성경에서 말을 하는 창조주의, 또는 창조주의 천사들의, 심지어 '내 안의 나'의, 도움이나 능력으로 하라고 이렇게 비비 꼬꼬 저렇게 비비 꼬아 인해 전술을 비유하고 철의 장막을 비유를 하고 수 백 가지의 명분과 명목을 만들어 시간 죽이기에, 성경에서 말을 하는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도, 하지 못하는 시간 죽이기에 도전을 한다고 하는 것일까?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이 있으면 각자 이해가 되는대로 자신의 것만 믿거나 아니면 정말 공존과 우리를 말을 하면 자신의 것에서 비롯된 것에 대해서는 재고나 성찰을 하지는 않고 그냥 미혹 당하고 현혹 당한 대로 이유나 사유 불문하고 단체로 장벽 만들어서 순장시키고 매장시키기에 급급한 모습만 나타나 보이는 것일까?  성경과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기에, 즉 오히려 유교에서 알고 있는 사람의 영혼에 부분 외에 그를 초월한 즉 사람을 창조를 한 영의 존재도 있다는 것과 그에 필요한 행위를 통해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을 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아는 한 불교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즉 불교의 수행자 중에서도 누군가가 여호와 하나님의 천사를 우연히 조우하게 되어 영의 세계, 즉 신의 세계를, 알게 되었을 수 있지만 그 지역의 사람의 영혼에 대한 이해나 종교나 문화나 사회 환경으로 인하여 사람이나 사람의 영혼의 신격화의 방향으로 가는 것을, 방지하고 오히려 수도나 고행과 깨달음이나 해탈이나 득도라는 본연의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보완을 하는 것일 것인데, 어디서 누가 무엇을 문제로 시비를 삼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이 잘 못된 것인지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또 1986년부터 만 보더라도 약 20년이란 기간 동안 천국으로 가라니 지구를 떠나라니 조상의 곁으로 가라니 외국을 가라니 국시니 뭐니 하는 이런 저런 핑계의 말을 하는 소리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만약에 그 당시에 몇몇 사람들로 하여금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에, 의해서 몇몇 실질적인 경험들이나 체험들이 가능하게 했으면 어떻게 이해가 되었을까? 즉, 장기간에 걸쳐서 선택한 사람을 통해서 무엇인가가 계획적으로 언행들이 진행이 되지 않고 단지 몇몇 일회성의 현상들만 나타나게 되었으면 앞뒤 생략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의 것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 TEN Production 영화 시나리오 작성 중 -


20070331.


정희득


추신)


사람들이 말을 하는 세상 물정이나 세상 관습이나 세상 지식이나 비록 보편 타당한 예법과 도리가 존재를 하는 것일 것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단지 예(Yes) 하는 것 밖에 없어 보이는 불가사의한 예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만나고 대화를 하는 사람들로부터 내가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성경에서 말을 하고 있다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에, 대한 것 및 기존의 관습이나 풍습 중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되는 그 때 그 때마다 이것저것 꼬치꼬치 질문을 하게 되니 심상찮은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느끼게 되니 어릴 때부터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들이나 신변 보호 같은 것을 요청을 하게 되고 지금과 같은, 또는 지금까지 약 40년에 걸친, 경우가 우려가 되어서 내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 일일이 기록을 해두라고 말을 하고 더불어 내가 만의 하나 사람 사는 세상의 일과는 무관하게 내가 해야 할 일이란 것이 있는데 사람들로 인하여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을 할지도 모르니 나의 기억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의 벽과의 타협을 위해서 내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 그런 말을 바탕으로 마치 사람이 한 것으로 일을 만들어 달라고 말을 하게 되었을까?


우리 사회에 대한 욕도 아니고 인정이 넘치고 넘쳐서 항상 문제가 되는 사람에 대한 욕도 아니고 사람이 살아 가는데 있어서 사람의 영혼도 있고 정신도 있고 의지란 것도 있고 등등이 있지만 사람이 만들어 낸 관습이나 선입견이나 편견이, 즉 인습이, 때때로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데 사용이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즉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의 목적이 주객이 전도가 되어 언젠가부터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것에 사용이 되게 된 것에 대한, 말이다. THE. FILM, SCENARIO, OF, TEN, PRODUCTION, 20070511, JUNGHEEDEUK, 정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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