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Movie)와 사명·증인을 찾습니다

천생연분

정희득이본명이자가명 2007. 3. 2. 01:17

천생연분

 

우리가 쓰는 말 속에 천생 연분이란 말이 있다. 타고난 연분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란 존재적 본질에서, 때로는 원초적 본능이란 말로서 이용이 되는 사람의 본질 아닌 본질적인 요소로서, 또는 사람의 자손대대로의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 아닌 본능이란 차원에서, 달리 생각을 하면 어떨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천생 연분을 찾는 일이 또는 만나는 일이, 달리 말을 하면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일이, 비록 사랑이란 말이 있지만 앞의 사람이란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지구상에 63억이 살고 있는데, 대한민국에만 5천 만 명이 살고 있는데, 일평생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이, 또는 비록 어느 날 갑자기 가슴으로부터 또는 두뇌로부터 또는 영혼으로부터 등등 사랑을 느끼는 누군가를 만났다고 하지만 그 사랑이 일평생 동안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이란 것을 아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람의 ‘사랑’이란 말이 그러나 자세히 알고 보면 대체로 상대방이란 존재에 대한 교감이나 이해가 없는 감정 또는 감각적인 요소의 ‘사랑’이란 말이 바뀔 때마다 또는 상대방에 대한 미지의 존재로서의 신비한 감정이나 이성으로서의 감정이나 무엇인가 야릇하게 흥분하게 하는 감정이나 남녀의 본능 아닌 본능적인 반응이 사라지면 이 사람 저 사람을 사랑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말을 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남녀 간의 일평생의 사랑이 앞과 같은 사랑 타령으로만 충족이 되고 만족이 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달리 말을 하면 최초의 상대방에 대한 감정은 이성의 감정이든 또는 눈까풀 뒤집어진 눈 먼 사랑의 감정이든 또는 맹목적인 사랑 타령이든 또는 이성적인 사랑이든 사랑이란 말로서 시작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후에는 상호 간에 상대방에 대한 신뢰감이나 일정 정도의 의무감이, 즉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없으면 일평생 좋은 관계를 유지를 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남녀의 사랑은 사랑이란 단어를 개인별로 어떻게 정의를 하는 것과 관련이 없이 연쇄적인 엄청난 사회적인 파장을 가져 온다. 즉 남녀의 사랑은 그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든 또는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으로 이어지든 단순히 둘 사이의 관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만약에 둘 사이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면 그 둘이 새로이 만나게 되는 제 2 또는 제 3의 관계로까지 이어지게 될 수도 있고 그 결과 제2 또는 제3의 가정으로까지 연결이 되고 더불어 새로운 생명의 잉태와도 연관이 되게 된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는 남녀 간의 사랑의 결과가 단순히 자신의 육체에 대한 자해뿐만 아니라 이미 잉태된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살인 행위로까지, 즉 수정체를 두고서 분화냐 미분화냐 또는 독립적인 생명체냐 아니냐 또는 출생전이냐 후냐 하는 등등의 것과 관계가 없이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 이루어진 잉태의 순간부터 사망 후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순간까지 연속적인 존재이므로 완전한 사회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사회적인 판단으로도 살인 행위로까지, 이어지게 될 수가 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도덕적 윤리적 범죄나 갈등 및 직업적인 범죄나 윤리성으로까지 이어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의 삶에, 즉 새로이 잉태된 생명체의 삶에, 대한 일평생 동안의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옛말에 ‘사람은 누구나 제 밥그릇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은 있지만 과거처럼 유목민 시대나 목축 시대나 농업 시대도 아니고 사람 사는 사회가 여유가 있고 서로 간에 열려 있는 것도 아니고 점점 물리적인 담벼락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니 편 내 편’이나 ‘니 당 내 당’이나 ‘니것 우리 것’과 같이 담벼락 아닌 담벼락에 의해서 담 아닌 담이 쌓여 가는 마당에 사람 사는 사회에서의 사람의 삶이 그렇게 쉽지 않으니 남녀 간의 사랑의 행위로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과 더불어 남녀의 사랑의 행위의 결과가 끝이 나는 것이 아니고 그 생명체가 이 사회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고려를 하면 경우에 따라서 일평생 그 사람에 대한 죄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앞과 같은 부정적인 모습은 사회 전체의 건강성이나 건전성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니 남녀 간의 사랑이 그냥 사랑 타령이니, 육체적 행위니, 원초적 본능이니, 하는 등등의 말로 쾌락이나 탐닉의 도구로만 또는 시대적인 흐름이나 추세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의 타락이나 범죄의 범람과도 가장 밀접한 것이 어떻게 보면 남녀의 성관계의 무분별한 것도, 즉 ‘사랑’이란 미명하게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달리 보면 상대방의 존재는 없고 단지 사랑이란 말로 포장이 된 즉흥적인 육체적 감각이나 감정의 발로로 자행되는 법률적 도덕적 윤리적 죄의식의 해이나 붕괴나 몰락도, 일정 정도 연관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의 행위가 남과 여의 상호 감정이 개입이 되는 것이니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을 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만큼 그런 것을 배경이나 무기로 한 남녀 간의 무분별한 사랑의 행위가 남녀간의 무분별한 도덕적 윤리적 해이나 사회 전체의 도덕적 윤리적 불감증이나 특정한 신드롬에의 중독이나 가치관의 상실 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연령이 문제가 아니고 또 결혼 전이든 결혼 후이든 마찬가지의 경우란 것이다. 

 

그래서 예술성이니 섹시니 컨셉(Concept)이니 하는 등등의 말로서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남녀의 사랑의 행위가 무분별하게 난무를 하는 것이, 그것도 영화나 드라마의 구성이나 진행과도 관련도 없이 관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사랑의 행위 장면이 등장을 하는 것이, 즉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표현 및 교감과 교류이기도 한 ‘은밀한’ 사람의 행위가 단순히 육체적 행위나 활동으로만 스크린에서 묘사가 되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예술성을 떠나 몇몇 의도적인 또는 기회적인 경우가 아니면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의 흥행이나 시청률과도 그렇게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 것이다.

 

남녀의 사랑의 행위가 표현이 되는 그 장면이나 그 시간 도안 사람은 무엇을 느끼며 그 결과가 사람의 감정에 어떻게 작용을 할까?

 

우리가 저녁에 주점에서 또는 ROOM SALOON에서 행하는 동일한 이벤트를 화창한 날씨의 대낮에 야외에서 행하면 어떨까?

 

대상이 환경이든 사람이든 사람이 주고 받는 감정적인 교류나 반응이, 의식을 하든 하지 못하든, 항상 특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고 또 사람의 삶에 있어서 습관이, 제2의 천성이니 하는 말들이 있듯이, 중요하다는 말도 누군가가 임의로 만든 말은 아닐 것이고 또 그리스도 예수님이, 즉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의 세계의 즉 영의 세계의 영이 거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시험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말을 기도문에 언급을 한 것도 깊이 생각을 해 볼 일이 아닐까 싶다. – TEN Production 영화 시나리오 작성 중 –

 

2007년 2월 27일

 

정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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