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Politics)와 사명

전작권과 주권과 자주

정희득이본명이자가명 2007. 1. 17. 12:26

전작권과 관계도 없는 주권과 자주

 

 

-                     어느 새 주권이나 자주가 정치적 명분이나 핑계 거리가 되어 버린 과거의 우리의 앞선 세대들의 노고를 늘 그렇듯이 깃털처럼 날려 버리는 조금은 불감증적인, 아이러니컬한, 우스꽝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그래도 늘어난 수명으로 연명에 연명을 거듭하며 너무나 오래 동안 살아야만 하는 우리들 –

 

향후의 한반도의 정세와 전작권; 만사불여 튼튼이라고 비록 가상의 전시를 위한 것이지만 전작권 있으면 향후 대한민국과 한반도 전체에 끼질 여러 가지 수월하고 유익한 점들이 많이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이 향후의 일들이 조금씩 힘들어지고 스스로 해야만 할 일들이 두 배 세배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고 똑 같은 일들을 하더라도 효과의 정도가 미미할 것이고 방법이나 방향이 조금씩 변경이 될 것이고 운신의 폭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지만,,, -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소사 중에서 주권 국가와 관계 되는 것이 몇 개 정도가 될까? 전작권 논의와 관련되어 언급되는 말들이나 진행되는 일들을 보니 해방이 된지가 언제인데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주권도, 자주도,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무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의 가정의 전시에서의 전작권과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 후 전쟁을 치르게 되는 과정에서의 연합군과의 전작권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 앞의 두 경우에 어느 것이 대한민국의 주권과 국익과 실리를 지키는 것에 더 유익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느 누가 대한민국이 남한과 북한으로 서로 대치 상태에 있는 한반도나 동북 아시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나 아메리카나 중앙 아시아에 위치해 있다고 말을 해 준 결과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한민국의 모습 그 자체만 보면, 물론 비록 상대적이겠지만, 이미 약 30년 전에도 전작권과 관련이 없이 자주 국방이 가능했고 지금도 충분히 가능하고 앞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전작권이 발생하기 시작한 배경부터 시작을 하여 지금까지의 우리의 상황이 우리 자체만의 능력과 모습만으로 해결이 되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이고 너무나 중요한 상황들에 의한 것인데 그런 것이 마치 주권이나 자주 국방과 관련이 된 것처럼 말들이 나돌고 있다. 전작권 자체도 마치 이념적인 대립의 소산이나 냉전의 소산물인 것처럼 말을 하는 시각도 있는데 엄밀히 보면 이념이나 냉전이나 동서양에 대해서 말을 하기 이전에 우리 자체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더 클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만의 세상 바라보기 시각으로 말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전작권에 관한 한 그리고 그 이후에 전개될 대한민국에서의 정세 및 한반도나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그에 따른 대한민국에서의 사람의 삶이란 관점에서 볼 때 어느 것이 더 주권과 자주와 애국적인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의, 향후의, 만약이란 가정하에, 하는 말이지만 지금 시대의 전쟁이 과거 50년 전 시대의 전쟁과 같을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만약이란 가정하에 지금의 대한민국의 사람들의 생활이 과연 북한과 같은 사회에서 이루어지거나 지탱이 될 수 있을까? 과대 포장 된 안보 논리나 전쟁의 논리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향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아무런 행동이나 조치도 없이 한반도의 상황이 지금까지의 경우와 같이 아무런 일도 없이 그냥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전세계가 국가 대 국가 간의 교류와 교역이 한참 적극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비록 일시적으로 주춤하게 될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의 문제로서 그리고 지금까지의 우여곡절처럼 누군가의 또는 다수의 고의적인 희생이나 대가나 피 흘림 없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순조롭고 평화롭게 진행이 되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지 점차 열려가게 될 상황에서, 남한과 북한만 철책을 사이에 두고 담벼락을 쌓고서, 즉 국가 구성체나 사회 구성체와 관련이 없이 육로를 막아 두고 그리고 해로와 항공로에 지장을 받으면서, 계속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누군가가 민주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의 대가라고, 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의 대가라고, 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를 먹고 자란 꽃이라고, 비유적인 표현을 했다고 하여 대한민국에서도, 한반도에서도, 나아가 동북 아시아에서도, 누군가가 희생할 사람들을 또는 가디언(Guardian) 아닌 가디언(Guardian)들이 될 사람들을 찾는다는 명분과 명목으로, 물론 궁극적인 목적이나 사유는 정치`경제`사회`종교적인 것에 바탕을 한 전혀 다른 것에 있겠지만 몇몇 허울 좋은 구실과 핑계로서,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삶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범죄 행위에 버금가는 일들이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보아도 앞의 말들이 비록 직접적이고 실감나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짐작이나 추측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신(God;The Lord God;Spirit)을, 즉 영(Spirit)을, 또는 경우에 따라서 귀신이나 마귀를, 만난 것에 의한 경험과 체험에 의하고 어릴 때를 비롯하여 사회적인 이해나 이익 관계에 휩쓸리거나 강요되지 않은 사람의 각각의 고유한 모습을 살펴 보면 사람의 본질이, 육체를 제외한 영혼과 정신의 영역이, 능력이나 영역과 관련 없이 각각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신(God;The Lord God;Spirit)의, 즉 영(Spirit)의, 존재의 그것을 일정 정도는 닮았고 그런 사람이 사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이상주의 사회나 천국과 같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사람 서로 간에 협력하고 협조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이겠지만 사회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각각의 사람의 자유와 평등과 인권과 존엄성이 충분히 지켜질 수 있는 행태로 사회의 모습이 갖추어질 수 있도록 사회 제도적으로나 사회 문화적으로나 일들이 진행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도 전 세계가 국가 구성체나 사회 구성체와 관련이 없이 고속도로와 철로와 같은 육로로, 해로로, 그리고 항공로로, 즉 사방 팔방으로, 점점 열려가고 개방이 되어 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 그 과정 중에 중요한 것의 하나가 국가 구성체나 사회 구성체나 조직의 구성체와 관련이 없이 그 속에서의 민주주의란 제도가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 말을 한 것이 누군지 모를 몇몇이 “애국” “애족” “우리” “우리 것”이란 말을 핑계와 방패로 삼아서 선량한 다수를 선동하고 동원하여 추구하고 있는 극단적인 국수주의나 쇄국주의에 가까운 폐쇄주의 형태의 국가구성체 추구에 반하는 것이라고 규정이 되게 됨으로써, 즉 만사에 대해서 극단의 편가르기 식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알게 모르게 또는 말이 전하여지고 전하여지는 과정에 의해서 “적 아니면 동지” 중에 “공공의 적”과 같이 인식이 되게 됨으로써, 재미와 장난으로 다른 사람의 삶이 마치 인해전술과 같은 인의 장벽으로 에워싸이고 둘러싸여서 시험 들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들이 마치 불감증이란 신드롬에 걸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곳 저곳에서 공공연하게, 죄의식이나 범죄 의식도 없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현상들을 보아도 앞의 말들이 비록 직접적으로 실감나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짐작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전작권을 회수하는 것에 대한 타당성에 대한 핑계로 가끔 언급하게 되는 불확실성에 대해서 무엇이 불확실성이고 어떤 경우가 불확실성일까 하고 생각을 해 본다. 전작권이 이양이 되어 독자적인 전작권 행사가 가능하면, 비록 전작권이 있어도 자국의 국방력이나 경제력이 충분하면 동맹의 피 흘림이나 희생이 없이도 독자적인 전작권 행사가 가능하니 궁극적으로는 전작권 자체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문제일 것이지만, 확실한 상황이고 동맹으로서 전작권의 공동 행사이면 불확실성에 속한 상황에 해당이 되는 것일까? 그러면 불확실성의 주체가 누구이고 대상이 또 무엇일까?

 

지금의 주제가 단순히 주권이나 자주나 경제력이란 단어상의 문제만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군사력으로 팽팽한 대립의 남과 북의 문제이고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사이에 있는 동북 아시아의 문제이고 더불어 단순히 남과 북의 문제와 동북 아시아에서의 입지 문제 외에 산적한 문제들에 직면한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외국에 자주 다니고 외국에 오래 계신 몇몇 사람들에게는 미국이나 일본이나 여타 선진 국가의 현실을 대한민국의 현실로 아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왜 지금 시점에, 조금 더 발전하고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동맹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 및 한 국가와도 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 지금 시점에, 주권과 자주란 말이 등장을 하게 된 것일까? 국가 대 국가의 관계와 외교적인 입지로 파생된 문제들이 마치 지금 현재 주권과 자주가 없는 것인 양 그래서 마치 주권과 자주를 찾기 위한 것의 하나로 전작권이란 말이 등장을 하고 여타 수많은 일련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주권과 자주가 없었던 그 동안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시기상의 문제인지 몰라도 대한민국의 현재 정세에 대한 발언들이 몇몇 젊은 사람들의 동조와 협조를 얻고자 정치적 시류에 편승하고 탑승한 것 같아 보이는 것이, 그것도 국가적 책무를 지고 있는 위치에 있는 경우의 모습으로서는, 조금은 아쉽기도 하고 또 무섭기도 한 것 같다.

 

단어상의 주권이나 자주의 문제가 아니라 앞의 내용에도 일부 표현이 되어 있듯이 대한민국이나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 아시아의 평화적인 공존과 더불어 동북 아시아의 세계사 속에서의 역할 증진과 그 속에서의 사람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 그리고 존엄성이 존중이 되는 삶을 위한다고 한다면 전작권은 한반도의 상황이 해결이 될 때까지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지 않을까 싶으며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전작권의 존재 여부와 관련이 없이 독자적인 전작권 행사가 언제 어느 때나 가능할 수 있도록, 또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자체를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정보`정찰`통신 및 항모 분야의 장비 및 기술력 보완에 더 치중을 해야만 하는 것이 우선 순위가 아닐까 싶다. 인류 공동의 “공공의 적”인 핵무기 개발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일부터 우선으로 하는 것이 주권이 사는 길이고 자주가 사는 길이, 그것도 애국 애족의 방향으로 상승하는 길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래 동안의 동맹국이었던 미국과 대한민국 양국 모두에게, 그리고 향후 북한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06년 9월 14일

 

정 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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