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Pictured Issue)

복 받는 새해 인사, 전우 편, 01,

정희득이본명이자가명 2007. 6. 22. 11:05

안녕하세요?

김 병장님

 

오스트레일리아의 공기를 마신 이메일을 다 받아 봅니다. 언제 직접 공기를 마시로 갈 수 있는 날도 속히 오리라 믿습니다. 터 잘 닦고 계시기 바랍니다.

 

잘 정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찍은 것 있으면 꼭 보내세요. 웹사이트에 올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지난 번 문 HJ 병장님의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것처럼 국내에 살고 국외에 살고 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 살아도 각자의 생활에 바쁘면 학창 시절 및 직장 동료를 못 보는 경우도, 특히 아주 몇몇의 특이한 이해 관계에 좌지우지 되다 보면 더욱더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으니 어디에 사는가 하는 것이 별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근래에 변형된 '우리'라는 정서가 가끔 우리 삶을 혼란스럽게 서로 간에 공격적이 되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그 목적이 '우리'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치 경제 사회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보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지역이나, 다른 국가에, 살기 위해서 간다는 것이 효의 문제나 가족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효나 가족의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이 고착화 된 삶의 방식에서 나온 것이고 특히 울타리 안의 삶을 강조하는 변형된 유교주의 사고 방식에 기인을 하는 것이지 사람 본연의 모습을 볼 때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곳에 있던 상호 간에 자주 연락을 할 수 있고 또 어느 곳에 있던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고 가꾸어 가는 것이 서로 간에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터넷 앞에서 서로 간 대화를 할 때도 그렇게 머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를 너무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하는 것이, 그것도 여러 가지 사람 사는 사회의 끈을 이용하여 그렇게 하려는 것이, 누군가가 잘 되더라도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가두어 두고 잘 되는 것을 보려고 하는 과거부터 유래된 사고 습관이, 우리 사회에서의 삶에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글로 된 인터넷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글로 된 인터넷을 볼 수가 있으면 언젠가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http://www.hdjpia.com/ 이나 http://cyworld.nate.com/  에서 '정희득님의 미니홈피'나 각종 블로그를 찾아서 읽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많은 글들로서 공개를 했듯이 다른 목적이나 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살면서 겪은 것들을 적은 글들이 있으니 비록 문학적인 맛은 없을지라도 읽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교란 것을 알기 전의, 신(God;Spirit)이라는 존재를 알기 전의, 즉 영(Spirit:God)이라는 존재를 알기 전의, 즉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즉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나 그의 천사들이라 불리는 존재를, 특히 그 당시 나의 고향이나 여타 지역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위리 사회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와는 전혀 달라서 추측조차 힘들었던, 어릴 때에 단지 그 존재의 형체가 본질적으로는, 즉 여러 가지 현상이나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려고 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고 또 그 존재의 존재적 본질이나 존재 방식이 사람 및 사람의 영혼과 다르고 또 그 존재의 능력에 있어서 사람 및 사람의 영혼과는 차이가 있고 또 그 존재와의 대화가 굳이 입으로 말을 하지 않고 생각만으로도 가능한 것 등등이 다르지만 사람과 사람이 아주 이성적으로 대화를 하고 때때로 놀이를 하는 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는 영(Spirit;God)의 존재에 대한 경험이나 체험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과, 그래서 우리 사회의 관습이나 풍습이나 특히 사고 방식과는 다른 것으로 인하여 어릴 때부터 내가 살던 고향에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도중 아주 간혹 곤란함을 겪었던 경우들과, 그 이후 그 사실과 연관된 것으로 인하여 어릴 때부터 대통령이 등등 되겠다고 하면서 군 복무시절에 발생을 한 일들 및 그 연속선상의 일들로 인하여 겪은 것들을, 글을 쓴 것이니 사람 사는 사회와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과는 또 다른 존재인 신의 존재에, 즉 영의 존재에, 대해서 말을 한 것이니 마치 수필처럼 읽어 보실 있기를 바랍니다. 신의 존재, 즉 영의 존재에, 대한 것이 지금껏 인류 역사상 나만의 언급은 아니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래된 것인지 불명확 하나 불교의 부처나 유교의 사람의 영혼에 대하여 그 본질적인 모습과는 달리 이해를 하고 받아들이게 되어 비록 그 존재 자체는 우리와 다른 것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의 존재인 것처럼 그리고 사후 영혼의 세계에 머물고 있을 것인데 우리들 공간 속에 살아 있거나 현세와 관련이 될 수 있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전래 된 대로 또는 누군가가 말을 한 대로 막연히 개념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도 있듯이 수 천 년 인류의 역사의 많고 많은 현상들 중 또 다른 하나의 현상으로서 전혀 이상할 것도 아니고,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글로서 쓰인 것은 없고 단지 입에서 입으로 하늘이나 신이나 산신이나 도깨비 등과 같이 전해져 오지만 신의, 즉 영의, 존재함에 대해서는, 그리고 신의, 즉 영의, 존재함을 증거를 하기 위해서 사람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다른 많은 인류들의 증거들이 수 천 년에 걸쳐서 있으니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것을 떠나서 지구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읽어 보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사람의 지식이나 사람 사회의 사람의 것을 전하거나 전수를 하고자 하는 경우들은 많이 있을 것이며, 또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사람의 지구상에서의 삶을 고려를 할 때 무엇인가 남기고자 하는 것도 또 사람으로서 당연하게 보이기도 할 것이지만, 사람 사는 사회에서 사람으로 존재를 하면서 강요를 하거나 협박을 하는 것이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저의 지구상의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지식이나 창작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서 글을 통해서 말을 하는 것이나 저의 삶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받는 것 없이, 때때로 간헐적으로 오해를 사면서까지, 간혹 말을 하여 온 것이나 여타 다른 많은 인류가 말을 하는 것이 그냥 심심풀이로, 또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지적 능력의 뛰어남을 위해서, 또는 소설로서 말을 하는 것은 아니고 크고 작은, 또는 각양각색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비롯하여 신의 존재에 대한, 즉 영의 존재에 대한, 경험이나 체험이 있는 사람이 그 존재함을 말을 하는 것은 비록 다수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경험이나 체험이 없고 비록 막연한 감정이나 느낌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알아야 할 사실이라는 것이며 그 결과 사후 영혼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사실이며 또 다른 무엇보다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저에 대한 것은 아쉽게도 앞에서 약간 언급한 어릴 때부터의 실질적인 경험이나 체험과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사람 사는 사회에서의 사회 활동적인 것으로 대통령이 등등 되겠다고 말을 하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제 주위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나 행동을 하면서도 일상에 찌든 나의 의지와는 관련이 없이 종교 관련 일에 때때로 휩쓸리게 되고, 또 1986년도부터는 생업에 찌든 나의 의지와는 관련이 없이 암암리에 정치 경제 활동 관련 사람들에게 휩쓸리게 되어서 지금껏 내가 말을 하는 것이나 행동 등이 마치 종교 활동을 하기 위한, 또는 정치 활동을 하기 위한, 하나의 기획물이나 연출물과 같이 여겨지고 근래의 시대 조류와 맞물려 시대적인 현상의 하나로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정상적이 사회 활동이 가능하나 육체적인 활동이나 훈련의 관점에서의 군 복무를 본다면 카투사로서 근무를 하니 군 복무가 가능할 정도니, 다른 기획이나 연출을 할 정도의 경우가 아닌 것은 같은 부대에서 같이 근무를 한 여타 병장님들과 더불어 김 완수 병장님도 익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on JY 병장님이나 Baek KS 병장님이나 Lee CW 병장님 및 Park MK 병장님이나 그 위로 Jang MH 병장님 및 Choi SM 병장님 등등과의 대화에서 말을 했던 것처럼 비록 달리기를 잘하고 근력이 좋고 그래서 몸놀림이 남다른 사람을 보면 무척 부러워하고 때때로 한 동안 넋을 잃고 쳐도 보고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개의치 않은 것은 상대적인 것이지만 지적 능력이나 여타의 재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육체적 활동이나 능력도 모두가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그런 관점에서 별로 개의치를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미모가 천차만별이듯이, 사람의 육체적 능력도 천차만별이고, 저도 그 중의 한 명이니 여타의 경우를 떠나 별로 개의치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언제부터인지, 아마도 십 수 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만, 우리 사회에서 알고 있는 성경이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에 대한, 특히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지나치게 고양된 또는 추상화 된 또는 때때로 전도된 개념이나 가치관으로 인하여 그리고 저의 경험과 체험에 대한 것 및 ‘내 안의 나’란 존재가 알려지면서 나아가 저의 사회 경제 활동 과정 중 한동안 발생하게 된 음주나 흡연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마치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또는 마귀나 악마를 만난 것처럼, 말로 표현하기 미묘하게 발생한 상황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의 존재와 세계와 지금까지 제가 말을 한 상황들과 경우들을 믿던 믿지 않던 우리와 공존을 하고 있으나 개개인의 마음 판에(또는 영혼) 기록 된 것을 바탕으로 사후에 심판은 있을지라도 그리고 심령어린 기도에 대한 응답은 있을지라도 매일 매일의 사람의 삶과 생활에 관여를 하지 않듯이, 즉 비록 영의 존재와 세계를 증거를 하기 위한 영의 세계의 목적과 예정에 의해서 사람의 몸 안게 거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를 하는 것인데, 즉 시공을 초월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관점에서 몸 안에 거하고 몸 밖에 거하고 하는 표현을 하지만 영의 세계의 영의 관점에서는 몸 안이나 몸 밖이나 공간적인 차이가 별로 없을 것이니 사람이란 존재와는 거의 독립적으론 존재를 하는 것인데, 사람에 대해서 마치 천지창조를 하듯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을 창조를 하여 생존을 하라는 식으로 집단으로, 그것도 대한민국 사회의 대의와 공의와 정의를 위한 정치 관련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서, 행동을 하면 집단에 의한 사회적 살인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에 대한 각양각색의 응답이나 성령의 은사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도의 주체는 사람이고 기도에 대한 응답이나 성령을 주는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거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영의 능력에 의한 것이지 그 사람 자체의 능력은 아닌데 기도에 대한 응답이나 성령을 언급을 한다고 하여서 언급한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거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영의 도움으로 생존을 하라고 집단으로 행동을 하는 것은 무엇을 '우리‘로 알고 있는지 몰라도 우리 것과도 관련이 없이 우리의 종교와도 관련이 없이 단지 다른 정치 경제 사회적은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종교를 핑계로 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의, 즉 영의, 즉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의, 즉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및 그리스도 예수님에 거한 영이 존재에 대해서 경험이나 체험이 있던 없던 신의 존재와 그 세계와 사람의 사후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고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리고 종교 문제를 떠나서도 사람이나 사람의 영혼이나 사후 사람의 영혼과 육체와 관계를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서 달리 판단이 될 수 있는 문제인 ’제사‘란 말로서, 사후 조상과 부모에 대한 이해와 지식과 그 결과로 인한 태도 문제인 ’제사‘라는 말로서, 사람에 대한 판단 기준을 삼는 것을 넘어서 대한민국에서의 정치 경제 등 사회 활동을 배척하거나 터부시 하는 것에 대한 이유나 근거로 삼는 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의 사람에 대한 태도 문제가 아닐까 싶으며 다수의 사람들의 사람에 대한 폭력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후의 조상에 대한 ’제사‘가 누구에 의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조선시대에 정착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조선시대와 같은 사람의 사람에 대한 차별과 사람의 신분에 의한 차별이 당연시 된 사회에서는 그런 차별을 조금 더 굳힐 겸 그런 차별에 대한 사람의 의식을 하나로 묶어 둘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자신의 조상과 자신의 근본에 대해서 알 필요에 의해서 ’제사‘란 것이 국가적으로 권장할 만한 제도로서 정착이 된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이 몇 백 년의 전의 조선시대도 아니고 그리고 그런 것과는 관련을 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God;Spirit)의 존재와 사람의 영혼과 사람의 사후에 대한 다른 글에서 밝힌 사유나 이유로 인하여 '제사’에 대한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인데 굳이 조상이나 부모에 대한 태도나 종교 문제로 그리고 우리 것이란 말로서 다른 사람의 대한민국에서의 정치 경제 등 사회 활동을 문제시 하는 것은 아마도 목적이나 이유가 이해 관계에 있는 다수의 조직적인 범죄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록 ‘말’만이라고 말을 할지라도 그런 것이 조금씩 영향을 미치고 그런 영향들이 또 모이면 엄청난 삶의 침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종교 자체에 대한 개념이나 가치관을 떠나서 과거부터 전래되어 오던 우리의 신앙 중 어떤 신앙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 외에 집단으로 다른 사람을 포위 공격하라는 말이 있는지 누군가의 개인적인 우리 것에 대한 개념에 의해서 정말 우리의 미풍양속을 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도 선택된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함을 증거 하기 위해서, 즉 영의 존재적 본질에 의해서 사람에게는 사람과 같은 물질적 또는 물리적 또는 육체적 존재로 나타나 보이지 않으니 그리고 늘 사람과 사람처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잊혀지기 쉽고 또 믿음이 흔들리기 쉬우니 그 존재함을 증거를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이나 사람 사는 사회의 일들과 관련된 현상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기도에 대한 응답 또는 성령에 대한 말을 한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천사들의 이름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상대로 그 사람이 말한 기도에 대한 응답과 성령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집단으로, 또는 마귀와 악마로 규정하여 단체로, 행동을 하란 말은 없지 않는가 싶습니다. 말 그대로 자칫 잘못 하면 집단으로 사회적인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사람의 영혼에 대한 부분을 살피면 사람의 육체 안에 사람의 영혼이 있다고 하지만 대체로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느끼고 하는 행동들은, 즉 빛이 없으면 볼 수가 없듯이, 육체적인 것들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 중에도 우리 분간하고 표현하기 힘들지만 영혼과의 끊임없는 교감이, 그래서 한 개인에게도 이 세상에 태어난 후부터 그 육체가 죽을 때까지 비록 습관은 있지만 그 모습이 정한 모습이 없고 63억 인구가 동일한 것 같으면서도 또 동일한 모습이 없듯이 육체와 영혼과의 영속적인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영혼을 인식을 하기가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여 말을 하기가 힘들 듯이 영의 존재인 신의 존재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과 담배에 대한 것도 일정 정도는 위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것으로 신의 존재를, 즉 영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시공을 초월한, 즉 사람의 물질적인 개념을 초월한, 신의 존재에, 즉 영의 존재에, 대한 이해나 개념이 잘 못된 것이 아닌가 싶으며 특히 그런 사회적인 행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직접적으로 판단하고 심판하고 단정하는 것은, 그것도 집단으로, 때때로 정말 치명적인 범죄 행위가, 십계명을 어기는 행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 그렇게 몸에 좋은 것이 아니지만 그 과정에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기를 치는 것도 아니고 거짓 증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도둑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살인을 하는 것도 아니니 직접적으로 신앙과 관련하여 판단할 문제는 아니며 정치 경제 사회 활동을 하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는 신앙인으로서 기도도 해야 하겠지만 마음속에 담아 두기 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풀기도 해야 할 것이니 그 과정 중에 여러 가지 모습들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금은 다른 경우이지만 신앙에 대한 문제가 언급이 되었으니 조금 더 말을 하면 가끔 시비 거리가 되는 음악에 대한 경우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귀를 즐겁게 한다니 감정을 자극한다니 하여 마치 신앙 생활과 대립이 되는 것처럼, 심한 경우에는 텔레비전과 같이 사람의 심성을 흐려서 아주 극단적인 위험 요소인 것처럼, 말을 하는 경우도 봅니다. 신앙을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해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제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과, 또는 약 2,000년 전 제사장이나 서기관과 그리스도 예수님 사이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본질과 성경의 본질과 신앙의 본질 등에 대한 논쟁과,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음악 자체가 감정에 호소를 하던 정신에 호소를 하던 영혼을 하소를 하던 또는 기쁨에 호소를 하던 슬픔에 호소를 하던 명상에 호소를 하던 경건함에 호소를 하던 또는 어떤 장소에서 어떤 상태에 있을 때 좋던 또는 예술성이 있던 없던 공통점은 사람을 감정을 순화시키지 나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측하기 힘든, 경우를 제외하고 술과 담배와 마찬가지로 음악 그 자체는 전혀 죄를 짓지를 않는다는 것이고 그 자체로 인하여 사람이 또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음이나 화성이나 리듬이 있고 사람에게도 감정이 있듯이 기도를 할 때, 특히 예배를 드릴 때, 그리고 명상을 할 때 맞지 않는 곡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인은 찬송가나 복음성가나 CCM을 불러야 하고 들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 없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십계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믿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하고 생각을 해 볼 일이 아닐까 싶으며 목적이 전혀 다른 곳에, 즉 정치 경제 등의 이해 관계 실현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것은 신앙이란 말과 전혀 관련도 없는 문제로 여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대립이나 분열 상태로 가게 되어 오히려 사람과 사람 간에 감정적으로 대립 아닌 대립되는 결과로 인하여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과 그리스도 예수님의 존재의 본질과 성경을 통해서 말을 하고자 하는 바는 변함이 없지만 사람은 ‘텅 빈 공간’이라고 볼 수 있는 태아부터 열정과 객기의 청년시절을 거쳐 어제 그제 한 말도 오락가락 하는 노망든 시점까지 여러 여정을 그치고 또 무슨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가에 그리고 개인적인 특성이 어떤가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출이 되고 있는데 마치 목회자의 생활 패턴을 가지고 여러 다른 사람의 생활 패턴에 적용을 하는 것과 같지 않는가 싶습니다. 목회자의 생활 패턴이 목회자로서의 직분을 수행을 하니 형식상, 외형상, 마치 신앙심이나 신앙 생활의 모범처럼 나타나 보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신앙이나 신앙심과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마음의 문이 점점 물질 문명의 소산물에 의해서, 사람의 지식과 과학에 의해서, 자연과의 괴리에 의해서 등등, 닫혀가고 막혀가는 21세기에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과 그리스도 예수님에 거한 영의 존재의 말씀을 전하고 또 사람의 사후 영혼의 세계에서의 안식을 위한 기도와 교통에 나아가 말씀 전하는 것에 힘쓰시고 더불어 말씀을 전할 사람들에게 목회자로서의 믿음과 신뢰를 주기 위해 세상이 흘러가는 모습과는 관련 없이 끊임없이 경건하고 신령한 모습을 견지하시는 목회자님을 그리고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신앙이나 신앙 생활과 그 근원적인 문제인 ‘죄’와 관련이 된 것의 본질이 그와 같지 않을까 한다는 것입니다. 유치원에 있는 것 같지만 매일 같이 팝송을 듣지만 죄를 짓지 않는 경우와 매일 같이 찬송가를 듣지만 생활 자체가 기만과 사기인 사람의 죄는 어떻게 판단이 될까요?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도 그 이전까지야 그 이전까지만 그 이후부터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일 것인데 여호와 하나님을 말할 때의 태도 따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말을 할 때의 태도 따로, 성경을 말 할 때의 태도 따로, 성경을 읽을 때와 성경에 대해서 묵상 할 때 그리고 성경을 덮고 난 후의 태도 따로, 말을 할 때와 행동으로 나타날 때의 태도 따로, 다른 사람의 언행을 판단할 때와 스스로의 행위를 판단할 때의 행위 따로, 기도나 예배를 드릴 때의 언행과 사회생활 속에서의 변화무쌍한 언행 따로, 등등 신앙이나 신앙심이 정말 간단한 것일 수도 있는데 신앙심과 경건함을 위해서 무척이나 많은 말들이 만들어지게 되고 그 결과 오히려 일상 속에서, 또는 전도 과정에서, 많은 죄를 짓게 되지 않는가 싶습니다.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나타나는 문제가 지금과 같이 바쁜 시대에 너무 장황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우리가 알기 힘든 신의 존재와, 즉 영의 존재와, 즉 신이 존재함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선택된 사람들을 통해서만 그 존재함을 알 수 있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와, 즉 영의 존재의 존재적 본질로 인하여 저를 비롯한 누구나 각각의 경험이나 체험 정도에서만 말을 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와, 관련된 그런 현실과 상황으로 인하여 비록 경험이나 체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의 존재가, 즉 영의 존재가, 존재 하는 것을 이해를 할 수 있게 말을 하고자 하니 조금 장황하게 또 많이 반복도 되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1986년도 중반부터 정치 경제 종교 등의 분야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듯 마는 듯 많이 엮인 것으로 인하여 사회 활동 자체가 복잡다단하여 그런 것이니 많은 이해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1986년도 중반부터 약 20년에 걸쳐서 누군지 모를 사람들로부터의 저의 삶에 끼치게 되는 영향들과는 별도로 2001년에 중반에 그리고 2003년부터 중반부터 그리고 2007년부터 있을 저의 종교 및 정치 관련 활동들이 있어서 비교적 상세히 표현을 하려고 하다 보니 그런 것입니다. 특히 여러 상황들과 경우들과 관련된 방식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히 표현을 하려고 하다보니 그런 것입니다.

 

물론 위의 과정 중에 신의 존재가, 즉 영의 존재가, 존재하는 것을 알아 보기 위한, 특히 능력을 알아 보기 위한, 다수의 사람들의 많은 행위들은 존재를 할 것이지만 그 자체가 연출이나 기획된 것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이 되실 때 꼭 읽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살게 되면서 여러 가지 국가니 민족이나 하는 개념들이 만들어진 것이고 그런 개념들이 만들어진 것이 사람이 사람 사는 사회에서 사람답게, 서로 간에 자유롭고 동등하고 소중한 존재로서 살게, 하기 위해서 일 것인데 근래에는 주객이 전도가 되어 오히려 '단어'를 위해서 사람의 삶을 구속하고 해치는 경우도 발생을 하는 것 같습니다.

 

신의 존재도, 즉 영의 존재도, 신의 세계와 사람의 존재와 사람의 사후의 문제인데 마치 지역이나 민족이나 국가의 문제인 것처럼 이론을 만들고 여론을 만다는 것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 병장님이 먼 훗날, 영어가 완벽하게 되는 먼 훗날, 그리고 넓은 대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의, 즉 영의 존재의, 즉 신의 존재의, 즉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의, 존재함을 알게 되거나 느끼게 되어 목회 활동을 하고 계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2007년도 한 해 이루는 바 많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0070118일

 

정희득 병장 드림.

 

 

추신)

 

대통령 임기가 중임제로, 최소한 연임제로, 바뀔 수 있도록 그리고 기간이 4년도 좋지만 현실적인 우리나라의 정치 실정이나 개개인의 정치에 대한 가치관이나 관점이나 방식을 생각을 할 때 그리고 개개인의 일상 속에서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성숙도를 고려할 때, 특히 국정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중도에 하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할 때, 5년이나 6년이 7년 등으로 바뀔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아멘!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