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Letter)와 사명

CDS, 03,

정희득이본명이자가명 2007. 6. 21. 12:57

(저의 다른 글들이 그렇듯이 글의 주제나 영역이나 대상이 저와 관련된 부분이나 신(God;Spirit)의 존재에 대해서 말을 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저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공간과 사람에 대한 것은 특정한 공간이나 사람에 대한 것은 아니고 다수의 이해관계가 모인 사회 속의 사람과 사람이 살아서 숨 쉬고 활동을 하는 공간인 사회에 대한, 때때로 살아 있기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사회에 대한, 그리고 사회 속에서의 사람과 사람의 관계나 관습이나 풍습이나 제도 등에 대한, 이야기이니 혹시나 글 속에서 언급이 되거나 유추가 될 수 있는 공간이나 사람이 피해를 받는 일이 전혀 없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혹시나 외람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래의 글은 저의 후배와 주고받은 글이나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 중 경우에 따라서는 알게 모르게 여기 저기 참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보내 드리니 전혀 달리 생각을 마시고 글의 형식이나 격식이나 여타 사회적인 관계를 떠나서 혹시나 시간이 되실 때 읽어 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지가 않으면 조금은 성가시겠지만 수신거부에 등록을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Modelling 과 Remodelling 2

 

 

잘 지내자,

근래에 잠 속에서, 꿈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들을 많이 본다. 이곳저곳에서 할 일들이 많은 모양이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가을에 광교산이나 도봉산이나 북한 등 몇몇 산을 오후에 등산해서 해질 무렵에 하산을 해 보길 바란다, 밝은 빛 아래서 할 일들을 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아멘!

 

앞의 글에 이은 내용이다.

내가 속한 사회나 내가 속한 민족이나 내가 속한 국가와 그 속의 구성원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으로 논하는 것은 아니고 근래의 100여 년 간 우여곡절을 겪어 왔고 그리고 그 앞의 400 여 년이 우리 사회의 역사이지만 사람이 사는 사회란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리고 사람의 존엄성이나 인권이나 인격이나 평등이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시대가 시대이고 또 어느 지역에나 있었던 과정이지만,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았던 것에서 기인을 하고 있는 더불어 그런 사실들 위에 부족한 것들만 잔뜩 있는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다 보니 파생이 된 것들이 많겠지만 한 명의 사람과 그 사람의 능력과 그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경우와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관습이나 환경 등에 대해서 간단히 하는 말이다.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더 뼈저리게 느낀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20060825번째 날에 있었던 일이다. 그 전에도 동일하게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말을 묻는 사람에게 대답 대신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가 하나님이, 또는 하나님이 있다면서, 그것도 모르는가 하는 말을 잠시 후 각자 다른 길로 갈 때 중얼거리듯이 말을 하는 것처럼 들려온다. 비슷하게 들려오나 다른 말을 했을 수도 있는데 오늘의 일뿐만 아니라 비일비재하게 아주 오래 동안 있어 왔던 일이라 하는 말이다. 본인들이 잘 못 알고 있는 부분도, 아마도 대체로 전도 과정에서 짧은 시간에 단 몇 마디 말로 전달을 하고자 하도 보니 잘못 전달이 되었거나 또는 그것 보다는 절대적 존재인 신(God;Spirit)에 대한 것으로 이해를 하기 보다는 동양과 서양 또는 우리와 외국이라는 개념으로 잘 못 이해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았겠지만, 있을 것인데 그런 현상이 어린 아이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우리의 표현으로는 어린 아이에게 가르칠 것이 없어서 좋은 것 가르친다고 말을 하는 일이다. 점점 열려 가는 세상에서 점점 더 교류가 많아져 가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상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합리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명석하고 현명하게 사고할 수 있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세뇌시키기에 단순하게 만들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모양이다. 좋은 우리 것과 좋은 우리 예절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사람과 사람에게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나 직위나 성 등 여타 것들에 의해서 예의나 행위를 표하거나 나타내야 할 대상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정치인과 유권자의 경우처럼!

 

조선은 하나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적 아니면 동지,

하나는 전체를 위해서 전체는 하나를 위해서,

무노동 무임금 등등의, 말들이 한참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들려오기도 한다. 정말 그들은 조선을 하나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지, 한라에서 백두까지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지, 적 아니면 동지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지, 하나는 전체를 위해서 전체는 하나를 위해서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지, 무노동 무임금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아니면 권위주의와 신분차별과 사람 차별과 성차별적 등등의 가치관과 보이지 않는 불법과 부정과 비리와 뒷거래 등등의 온상의 삶의 표본이면서 늘 말을 할 때는 자유와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포장한 채 가장 진보적인 또는 가장 휴먼적인 말을 연설문 외우듯이 말을 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게 있듯이 정치권력을 잡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용하고 희롱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들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무노동 무임금이란 말은 무슨 말인지 알고 싶어서 혹시나 들은 풍월이 있는지 물어 본다. 그러면 만약에 정치권에서의 무노동이라고 할 때의 무노동이란 말은 또 무슨 말일까 알고 싶어서 혹시나 말을 한다. 나아가 정치권에서의 노동이라고 할 때의 노동에 대한 정의와 그리고 개별 노동에 대한 임금을 계산한 규정이나 규칙이라고 있으면, 행여나 혹시나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라도 있으면 되살려서, 알려주기 바란다. 믿기지 않겠지만 앞의 무노동 무임금이란 말이 나와 연관이 되게 된 일이 있고 나아가 실제적인 경우로, 네가 나를 20년 정도 알고 있으면 어디가 농담이나 장난이고 어디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사실대로 말을 하는 것쯤은 분간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여기저기서의 활동이라고 할 수도 없는 활동들이 정말 사소하게 인위적으로 의도적으로 차단을 당하는 느낌을 수없이 받고 있어서 네게 말을 한다. 그리고 만약이란 가정 하에 무노동 무임금 원칙대로 하고자 하면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삶을 기간에 관련 없이 결과적으로 방해하고 훼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경우에 따른 임금 체불 없이 항상 임금을 지불할 능력이나 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들이 경우들이 상황들이 늘 그러했듯이 그 때는 또 임금 계산 방식이 “세상이 정체된 것이 아니고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이며 ”조삼모사“이고 ”화장실 갈 때 마음과 화장실 나올 때 마음 다르다“고 등등의 말들로서 다르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가 알고 있는 정치 행위는 구호 외치며 달리기 하는 사람들 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다니는 길가의 어딘 가에 무노동 무임금의 적용을 삶의 기치로 내걸고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적용할 대상이 있어야 하니 그 대상을 물색을 하고 그 대상에게 또 적용을 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추가적인 행위들을, 아직도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고자 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01년 8월 16일 그 날 들려오기로 어디선가 그런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혹시나 나의 많고 많은 이메일이나 글들에 대해서 조금은 낯선 무엇인가가 느껴질까 싶어서 하는 말인데, 2001년 8월 16일의 나의 상황이나 나의 일이 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 방송을 통해서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누군가가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말을 하는 것을 듣는 것이나 담벼락 너머에서 길가는 누군가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이나 아니면 사람이 항상 인지나 인식을 할 수 있는 존재 방식이나 본질로서의 형체가 없는 존재가 귀로 또는 뇌세포로 또는 생각이나 마음속으로 직접 알게 하는 것이나 신(God;Spirit)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나 신(God;Spirit)을 만난 경험이나 체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단지 존재의 차원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대화 방식이 다르고 그 때의 느낌이 다르고 그 때의 내용이 다르고 등등 할 뿐이지 대화를 나눈다는 또는 말을 들을 수(또는 주고받을 수) 있다는 차원에서는 거의 비슷한 경우이니 전혀 이상하거나 낯선 경우는 아니니 달리 생각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 별로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God;Spirit)의 존재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우리 사회에 대해서 그 속의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해서 등등 말이 많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더 근원적인 이유는 자주 만나서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무노동 무임금을 어떻게 적용을 하고 학계에서는 무노동 무임금을 어떻게 적용을 하고 기업에서는 무노동 무임금을 어떻게 적용을 하고 등등을 정해 두고 그 자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본인의 기준에 따라서, 또는 본인의 기준에 맞는 생활이나 삶을 살 때까지, 이곳저곳에 연락을 하고 이곳저곳을 쫓아다니고 하여 이것저것 일들을 방해 아닌 방해와 훼방 아닌 훼방을 하게 되는 사람이, 아직까지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무슨 분야 어느 누구에게든 매일 같이 직접적으로 무노동 무임금을 적용할 수 있는 관련된 행위들이 몇 개나 될 것인가? 대체로 무슨 일이든 그 일의 목적이나 의도 그 자체가 갖는 문제보다도 적용 범위와 적용 대상과 적용 방법과 특히나 정보 공유 과정과 의사 소통 과정 등이 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에디슨도 아인슈타인도 괴테도 마르크스도 등등 본인들을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과정이 있고 기간이 있는데 영역별로 본인만이 정한 기준을 두고, 물론 본인의 말에 의하면 목적과 의도는 좋은 것 - 상대성이론을 빙자하여 “적”이 망하는 것이 “아군”에겐 좋은 것이라는 말로 말장난을 치는 경우도 있으니 이 말 자체도 의문이지만 - 이라고 말을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단지 신(God;Spirit)이 존재를 한다고 하였다고 하여 신(God;Spirit)을 만나고 의사 소통이 가능한 일이 있다는 말을 하였다고 하여 신(God;Spirit)이 사람의 몸 안에 비록 보이지도 존재가 확인도 되지는 않지만 거할 수도 있다고 하여 영(God;Spirit)적인 또는 영(God;Spirit)의 세계의 무엇인가가 몸 안에 있다고 하여 더불어 무엇보다도 (God;Spirit)신이 사람이나 사람의 영혼이 아니고 전혀 다른 영(God;Spirit)의 존재라고 말을 하였다고 하여 등등 신(God;Spirit)의 능력으로 알아서 행동을 하라는 식으로, 즉 언제부터 몇 십 년 후면 죽어서 영혼의 세계로 갈 존재가 그래서 지옥이나 천당이나 구천을 맴돌게 될지도 모르는 존재가 신(God;Spirit)의 존재에 대해서 이것저것 시험을 하는 식으로 또는 이래라 저래라 말을 하는 식으로 달리 말을 하면 신(God;Spirit)의 존재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라 현시점만 보더라도 63억 인구 중의 단 한 사람에 불과하고 본적도 만난 적도 없는 영(God;Spirit)의 존재에 대해서 늘 고정되어 있지도 않는 본인의 생각을 그리고 사후면 알게 될 본인의 마음 판을 읽어서 본인이 한 일을 알아서 그에 맞게끔 행동을 하라는 식으로, 그런 것을 떠나서도 사람 대 사람으로 다른 사람과 그 삶에 대해서 그와 같은 생각이나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나아가 사람의 존엄성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지구상에 사람이 존재를 하는 것 자체가 십계명에도 있듯이 누구나 자유로이 누구나 평등하게 본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사후가 되면 지상에서의 삶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 것이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듯이 충심어린 간구와 기도에 대한 지혜나 깨달음이나 응답을 받게 되지만 매일 같이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63억 인구의 시시각각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것까지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종교를 떠나서 일반적인 상식일 것인데 단정적으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군지도 모를 누군가의 삶 속에서 누군가가 어느 날 다른 사람을 또는 신(God;Spirit)의 존재를 시험하고자 한 일에 대해서 매일 매일이 힘든 다른 사람에게 신(God;Spirit)의 능력으로 또는 당사자의 능력으로 누군가가 한 일을 알아서 그에 맞게끔 행동을 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설사 그 사실 자체는 알아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누군가의 방식에 맞게끔 행동을 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조금은 의아스럽다. 지상에서는 왕이 최고이니 신(God;Spirit)이든 신(God;Spirit)을 만난 사람이든 신(God;Spirit)이 거하는 사람이든 성령을 받은 사람이든 등등 경우를 막론하고 왕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삶의 모토나 신조나 지침이나 계명 등으로 불변의 진리로 알고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새로이 생긴 것이지도 모를 일이다. 지상에서 왕이 아닌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다수가 얼마나 많은 흩어진 시간과 비용을 감당을 해야 할 일이었을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노동 무임금이란 말이 열심히 일하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가치를 인정 받고자 한 말일 것인데 비록 의도가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나타나기로는 오히려 그것을 빌미로 이곳저곳에 연락을 하고 말을 만들어 다른 사람의 삶을 방해를 하거나 훼방을 하는 경우로 나타나게 되면 예를 들어 나를 돕고자 하는 행위가 오히려 나의 삶을 방해를 하는 행위가 되게 되니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한다. (참조: 여기서 “나”는 정희득을 의미하며 “나씨” 성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

 

자랑스러운 후배 네가 당장 네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게 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며 할 수 있는 일이, 즉 실질적으로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나 될 것인가? 하루살이 인생이 아니라 앞으로 수 십 년을 수 백 년을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서 계속적인 발전과 삶을 가꾸고자 하는 의미에서 소득을 올리는 일을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가 될 것인가? 대체로 노력과 노력이 모여서 어느 분야든 뭔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누군가가 정한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의 삶을 방해 아닌 방해를 하게 되고 훼방 아닌 훼방을 하게 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2001년 8월 16일 그 때 말만하고 그친 것인지 계속 존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길게 말을 하게 된다. 정치 분야로 생각을 해 보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정치인이라고 신문지상인 매일 같이, 자주, 가끔, 방송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정치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이 꼭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 것인데 더구나 하루에 이루어지는 수많은 행위들 중에서 임금을 계산을 하기가 정말 힘든 것이 많이 있을 것인데 즉 무엇을 하는가 왜 하는가 여러 가지가 고착된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무엇인가 등등은 것은 살피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알지도 못하는 기준에 맞추어서 또 다른 누군가가 하는 말만 들고서 누군가가 “무노동 무임금”이 삶의 기준이나 원칙이나 모토나 소신이나 계명이라며, 즉 1986년 도에 내가 사람이 아닌 성경을 그 중에서도 십계명을 삶의 기준이나 원칙이나 모토나 소신이나 계명 등등으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고 말을 한 것에 기인을 한 것으로 그것을 나의 사회·경제 활동이나 정치 활동과 연관을 시켜서 그렇게 살면 사람 사는 사회에서 정말 살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누군가와 깊은 기존의 정치적·경제적·종교적 이해관계를 가진 누군가를 후견인이나 청지기나 대부나 대모나 정신적인·영적인 무엇으로 삼게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더불어 특정한 사람 대신 삶의 기준이나 원칙이나 모토나 소신이나 계명으로서 내가 성경이나 십계명을 말을 했듯이 알지 못할 그 누군가도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을 만들고 지향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여하튼, 이곳저곳에 연락을 하게 되고 조직을 구축하게 되니 다른 무엇도 아닌 현재의 나의 처지에 의한 결과론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삶에 사사건건 방해 아닌 방해와 훼방 아닌 훼방이 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목적이 무엇일까?

 

다른 사람 잘 되는 꼴을 못 본다,

이웃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송충이는 솔 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된다 등등, 다른 글들에서 표현을 한 다른 많은 표현들과 더불어 그냥 하나의 암구호나 지향점으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앞과 같은 사유나 이유로 전혀 모르게 연관을 시키게 됨으로써 최초의 그룹이나 모임을 만들어서 후원을 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전혀 별개로 몇몇 공개적으로 또는 겉으로 여기저기 드러내지 못할 사유들로 다른 사람들과 그 삶들을 망치게 되고 방해 하게 되고 훼방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누군가가 우리 사회에서 삶을 살아가는 도중 우리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정치인이나 뭔가 다른 사람을 후원하고자 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 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빌미꺼리가 되어 다른 사람들과 그의 삶들을 방해 아닌 방해와 훼방 아닌 훼방을 하게 되는 경우로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And then Why? 

 

오늘도 대한민국의 정치는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행위와 관련이 되었던, 경우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책에 따른 정치 행위가 아니라 여타 요소로서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범죄 행위를 넘어서 실증범적인 범죄자와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대한민국이라는 곳의 중요한 사회적 자리나 위치에 두고서 마치 정치 행위의 본모습이고 정치 행위의 당연한 결과인 것처럼 보이는 과정들을, 모습들을, 보는 것 같다.

 

또 다른 조금은 구체적인 하나의 예를 가정을 하면, 앞에서 말을 했듯이 우리 사회에 살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정치 분야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전략가나 지략가나 참모나 후원자나 등등 뭔가를 하고자 하는데 그 사람이 개인적인 능력이나 여러 가지 상황들로 약 50년은 족히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된다는 말이 있고 그런데 여러 가지 사회적인 활동의 이해관계의 결과 네가 이미 관련이 되게 된 사람들이 9 명 정도가 있다고 가정을 하게 되면 일정 정도 나이나 사회·경제·정치 활동의 경력을 보더라도 전체 10여명을 순차적으로 지원을 하게 되면 누군가에게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고 더불어 네가 사회적인 이해관계의 결과 알게 된 9명에게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한다면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 아니면 목적은 순차적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실제로 그런 경우에 가능한 경우는 10명 중 맨 처음 지원을 받게 되는 사람뿐일까? 아니면 모르긴 해도 각각의 능력을 보고 주위해서 발생하는 경우들을 보더라도 최소한 몇 명은 가능할까? 아니면 최초의 의도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르게 사회적인 이해관계에 의한 9명을 포함한 10명을 동시에 지원을 하여 경쟁으로 하게 만든 후 한 명만 지원을 하면 그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최초에 의도대로 50년은 족히 정치적 수명을 유지하고도 남을 사람을 지원한 후 그 사람과 여타 배경들이나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서 50년을 채우든 45년의 채우든 30년을 채우든 25년을 채우든 하게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일까? 위의 경우에서는 어느 경우가 가능할까?

 

그러면 만약이란 가정 하에 10명을 지원한다고 한다면 10명을 지워할 수 있는 지원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또는 몇 명만 고려를 한다고 할 때 그 몇 명을 지원할 수 있는 지원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러면 그 열명이란 숫자에 대해서 말을 하자면 어떻게 해서, 또는 어디에서, 또는 왜, 10명이 되었을까?

 

가끔 이곳저곳에 다니다 보면 기본적인 예의라곤 어디 쓰레기통에 비린 것인지 수세식 변기의 화장실에서 물 내릴 때 같이 내려 버린 것인지 없어 보이는 남녀 구분 없이 젊은 사람들 또는 어린 아이들을 본다. 마치 둘 사이에 대화를 하듯이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말을 한 마디씩 한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내가 겪은 바로는, 정말로 잘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이 아마도 대한민국 사회에 꽤나 영향을 미치는 곳이나 공간이나 사람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지 모르겠다. 현재의 또는 현재까지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도 있는 이유도 그런 곳에 일정 정도 있지는 않는가 싶기도 하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정치인과 유권자의 관계면 경우에 따라서 정치인이 그냥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또는 인격체로서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만사 불문한 불문율로서 비치는 것은 왜 그럴까? 아니면 매일 같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고 방송을 타고 있는 어디를 위해서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 또 다른 만사불문의 불문율로서 비치는 것은 왜 그럴까? 잘못된 느낌이나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으나 내가 살아오면서 알고 느끼는 한에 있어서 그 동안의 나의 삶의 기간 동안을, 약 20년 또는 약 40년 동안을, 나의 주위에서 대한민국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맴돌았던 우리 것, 자주, 애국애족, 민주, 노동자의 권리, 인원 등등의 결과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그냥 든다. 앞의 말 하나 하나는 정말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 비록 세계화와 비록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지향하기 위해서 열린사회를 만들어가더라도 앞의 말 하나 하나는 정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말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알고 있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고, 다른 사람과 다른 나라 및 그 속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가 등등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사회 속에 우리가 흔히 선이라고 하는 것과 악이라고 하는 것이 공존하는 것 자체는 세살 박이 어린 아이도 알 일인데 그런 것을 실제 경제활동을 하고 있고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의 생활과 삶을 상대로 모델링을 하고 그 사람이 속한 생활공간을 무대로 하여 실제 경험과 실제 체험을 통하여 각골명심하게 가르친다고 사건사고들을 연출을 하고 계획을 하고 기획을 하는 것이, 그러나 사람의 경험이나 체험의 특성이나 한계란 측면에서 달리 보면 남·녀·노·소를 떠나서 정말 소중한 시기의 이 십 년이란 세월을 허송세월하고 낭비하게 하게 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선함과 열성과 씽크 탱크(Think Tank)들이 보여주는 모습이고,

 

더불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 사는 세상의 것들에 대한 종교적인 교훈이라고 가르치는 그러나 실제 현실 속의 결과적로는 세상 속의 삶에서 유리되는 것을, 그것도 종교와 교파를 초월하여 공통된 종교적인 교훈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는 그러나 신앙심과 경건함을 떠나 매주 예배를 드리고 쉬지 않는 기도를 다한다고 하나 육체를 가진 사람이란 관점에서 보면 세상 속의 삶에서 삶을 단절시키는 것을, 가르치게 되면서 불변의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곳저곳의 선량한 사람들로부터 온갖 정신적·물리적 지원을 받은 것이 우리 사회의 사회성이 보여주는 모습이고,

 

더불어 계층이나 산업영역이나 직장분야나 생계영역이나 남·녀·노·소를 넘어서 한 풀이나 소원 풀이를 한다고 하는 것이 그 과정을 통해서 몇몇 사람들이나 단체들이 그들에게 필요한 누군가의 인적 물적 지원 받고자 변질되어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즉 한 풀이나 소원 풀이에 대한 하나의 가상적인 예로서 말을 하면 생계로 번역하는 분들의 애환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매일 매일 살기에도 바쁜 누군가를 상대로 하여 그 누군가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끔 그 누군가와 관련된 상황 설정을 알지도 못하는 선량한 다수의 물심양면의 도움으로 가능하게 하는 모습들을 보니,

 

일정 정도 시대적 상황이나 시기적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런 차원을 떠나서,

 

어느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게 되던 하지 않게 되던 각자의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순간적으로 뚜껑이 열려 마치 공중부양이라도 된 것인 양 이성적인 판단과 정상적인 생각이 마비된 사람이 특정한 목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서 부여 받은 권한을 넘어선 온갖 광적인 모습과 안타까운 모습들의 결과로 남용이라는 남용과 비릿함이란 비릿함과 도덕적·윤리적·종교적인 죄의 의식을 넘어서 현재 실증법적 범죄적 행위들처럼 보이는 것에, 비록 말뿐이고 상황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전후 사정을 모르는 당사자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것에, 동조를 하지 못하거나 않는 것을 구분을 하지 못하는 것이 그래서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을 한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행동을 하는 모습들이 일정 정도 이해가 된다. 어떤 경우나 상황이면 비록 말만 난무를 하거나 말로서 연출되는 상황만 난무를 한다고 할지라도 위와 같은 일련의 행위들이 그것도 여러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서 하는 경우들이 가능할까? 무엇에 관한 일이고 어떤 일이든 하루 속히 밝은 하늘 아래에서 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속히 와야 할 것인데 그래서 사랑스러운 후배가 동귀어진 하자고, 같이 익사하자고, 하는 말을 선배에게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내가 A4 용지로 10,000 페이지에 가까운 글들을 성경에 대해서,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더불어 우리가 신이라고 하는 존재의 실질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것도 나의 사회적인 입지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의 40년 동안의 삶의 경험을 통하여 더구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경험들을 통하여 말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앞으로 몇 백 년을 살 수 있게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릴 때 일이 나에게 있어서는 거짓이거나 가상이 아니고 1986년 중반의 일도 나에게 있어서는 거짓이거나 가상이 아니고 2001년 중반부터 지금까지의 일도 나에게 있어서는 거짓이거나 가상이 아니듯이 내가 살아야 할 길을 가야 할 의무나 노력은 나에게 있는 것이고 그래서 나를 온전히 이해를 하고자 하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 같이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사회 활동에서 겪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현재 나의 모습을 보면 아무리 네가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운 경우라고 하더라도 일정 정도 알 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여기까지도 이미 약 20년 전에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막지 않았냐고? 다른 글들에서 충분히 소상히 말을 했지만 하나의 가상적인 예를 들면 설사 네가 나에게 이런 저런 좋은 의도를 가지고 일을 도모를 하고자 하는 그러나 나에 대한 이해가 실질적이고 못하고 너무나 피상적이고 추상적이라서 궁극적으로는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일을 하게 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내가 가만히 앉아서 놀아도 될 상황이 아니면 24시간 네 일거수일투족을 어떻게 제어를 하겠니? 일거수일투족을 제어를 할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건건이 어떻게 간섭을 하겠니? 이와 같은 경우는 일을 꾸미거나 만드는 당사자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 밖에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경찰 열 명이 있어도 도둑 한 명 막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또 병이 도진다. 그만 쓴다. 꺼이꺼이꺼이.

 

Today’ English Tips;

 

Time and tide wait for no man.

In order to enter the arena of politics in Korea what kind of activities, do you think, are required?

In order to enter the poetical arena in Korea what kind of activities, do you think, are required?.

 

 

2006년 8월 25일

 

정 희득 선배가,,,

 

 

야훼님(여호와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영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살아 있는 전지전능한 지혜와 끊임없는 축복이 늘 함께 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Yahweh's(Jehovah, The Lord, God, The Lord God; Spirit) and Jesus Christ's, His Spirit, Living Almighty Wisdom And Inexhaustible Blessings Be Always With You With All My He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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