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靈,Spirit)과 사명

환영과 성령에 대한 이해 06

정희득이본명이자가명 2007. 2. 3. 19:31
울산 바위에 얽힌 전설 고등학교 교사로서 있을 때, 아마도 1992년도에, 언젠가 '울산바위'와 ‘흔들바위’란 이름이 있는 곳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바위 위에 얹혀 있는 큰 바위가 계곡의 풍경을 보기 위해서 서 있는 나의 뒤에서 흔들린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위험한 생각이 들어서 굴러 내리지 않을까 싶어서, 바위가 커서 혹시나 계곡에 있는 누군가가 다칠까 싶어서, 흔들리는 바위를 멈추어 세운 때가 있었다. 흔들리던 바위가 멈추었다. 나의 느낌만인지 실제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계곡을 살펴보고 있는 나의 뒤에서 바위가 흔들리는 것을 손으로, 몸으로, 부딪히게 되니 느꼈고 그래서 내가 돌아서면서 멈추어 세우고자 하면서 멈추어 섰으니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있었다. 그런 후 바위를 자세히 둘러보니 누군가의 손만 닿아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이 마치 모서리만 얹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혹시라도 모르니, 바람이 강한 태풍이라도 불면 굴러 떨어질지도 모르니, 뭔가 돌 같은 것을 받히어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말을 하니 모두 반응이 없다. 실제로 내가 움직여 보니 끄덕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몇몇이 같이 힘을 합세하자고하여 같이 힘을 써도 끄덕도 없다. 그래서 장난하지 마시고 한 번 움직여 보자고 하니 장난이 아니고 자신들도 한 번 움직여 보고 싶어서 있는 힘을 쓰고 있는 중이란다. 그런데 누군가가 걱정하지 말란다. 실제로 여러 명이 힘을 써서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누군가 자신이 아는 바로는, 아직까지 없다고 한단다. 외형만 그렇지 끄덕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언제부터 바위가 그곳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태풍이 불어도 여러 번 불었을 것이라고 한다. 내가 감탄한 말이다. 여하튼 나의 입장에서는 바위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고 그리고 바위를 보니 꼭 모서리만 얹혀 있는 것 같으니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를 것 같아 당연히 그렇게 반응이 나온 것이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움직이게 된 것이고 또 어떻게 멈추게 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바위의 크기로는 사람 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는 바위를 에워쌀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의 바위였다. 그런데 그 바위가 바위 위에 얹혀 있는 모습이 누군가의 손가락만 닿아도 흔들릴 것이 모서리만 걸려 있는 것 같은 바위였다. 아마도 그래서 흔들바위가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지렛대의 원리라고 한다. 그래서 들러 보니 지렛대를 넣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기에 다시 한 번 보여 달라고 하니 그냥 가려고 하기에 내가 막대기를 찾아서 해 보려고 하니 이번에는 아마도 귀신이, 다른 사람 말로는 신(God;Spirit)의, 즉 영(Spirit;God),의 존재가 또 다른 사람 말로는 내가 정의를 하는 대로, 움직인 것일 것이라고 말을 한다. 경험이나 체험이 있었던 아니면 삶의 과정 중 막연히 알게 되거나 느낀 경우이던 신(God;Spirit)이, 즉 영(Spirit;God)이, 즉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I AM)가, 존재는 하고 있는 것은 알겠지만 그 실체가 보이지 않고 형체가 잡히지 않으니 더구나 종교가 많고 종교에서 말을 하고 있는 존재가 많으니, 특히 동양·서양의 개념과 우리 것 외국 것 하는 식으로 일상 사회 경제 활동으로 대립하고자 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으니, 비록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추론을 할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경험이나 체험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은 모양이어서, 아마도 그 정체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 때 누군가가 나에게 나의 생각을 묻기에 다른 사람이 말을 한 것과 거의 비슷하게 신(God;Spirit)의, 즉 영(Spirit;God)의, 즉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I AM)의, 존재에 대한 경험이나 체험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떠나서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추정할 수 있는 실제적인 신(God;Spirit)의, 즉 영(Spirit;God)의, 즉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I AM)의, 존재에 대한 것과 별개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언행들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니, 더불어 때때로 마치 싸움을 할 듯이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특히 같은 종교와 신앙 안에서도 신(God;Spirit)의, 즉 영(Spirit;God)의, 즉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I AM)의, 존재에 대한 사람의 관점에서의 개념이나 이해를 하는 방식이 다른 것은 고려를 하지 않고 단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자신의 표현과 다른 것으로 인하여 이단시 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으니, 종교에 대한 것은 상대방의 성향을 알기 전에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편하지는 않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말을 하면 동양이나 서양이니 또는 우리 것이니 외국 것이니 하는 것을 떠나서 신(God;Spirit)이, 즉 영(Spirit;God)이, 즉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I AM)가, 가상의 존재도 아니고 사회 질서와 사람의 심리적 평안을 위해서 가상으로 만들어진 종교를 위한 상상의 존재도 아니고 사람의 인지 능력과는 관련 없이 그리고 사람의 경험이나 체험 여부와는 관련 없이 실제로 존재를 하고 있으며 그 정체성은 사람은 아니며 우리가 영(Spirit;God)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듯이 비록 영(Spirit;God)의 정체성을 실체를 파악을 하기가 힘들지만 영(Spirit;God)의 존재란 것이었다. 물론 사람의 영혼에 영이란 말도 들어가지만 여하튼 사람이나 사람의 영혼과는 전혀 다른 존재란 것이었다. 그리고 종교를 가질 것이면 동양이니 서양이니 우리 것이니 외국 것이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 교회를 가라는 말과 더불어 성경을 읽어보라는, 성경에 있는 내용을 믿어 보라는, 말이었다. 나도 구체적인 세세한 문구와 내용들은 여기서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신과, 즉 영와, 즉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와(물론 이 표현은 그 당시 몰랐지만 성경에 그런 표현도 있다고 하여 우리가 ‘신’ ‘영’ ‘(여호와) 하나님’ ‘천사’ 등등이라고 표현을 하듯이 존재 방식의 관점에서 표현할 것이라는 말을 나누기도 함), 사람이 만나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을 한 것이니 성경을 읽어 보란 말을 한 것이고 불경이나 사서오경에 대해서는 불경과 사서오경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 및 사람 사회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한 것들이니 읽어서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는가를 깨달으면 좋지만 우리들 각자가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도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깨닫고 있듯이 성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란 말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굳이 신앙의 관점에서 말을 하면 오히려 교회를 가고 성경을 읽는 것이 맞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이론적으로는, 논리적으로는, 즉 원론적으로, 많고 많은 학문을 연구하는 것의 경우와 같이 불교의 깨달음이나 득도를 하는 것이나 유교의 사서오경을 아는 것이 사람의 사람으로서 추구를 하는 행위이니 신(God;Spirit)을, 즉 영(Spirit;God)을, 즉 하나님을, 믿는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별로 관련이 되는 것이 없는데 실제 현실 속에서는 전체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 경우에는 마치 서로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나타나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불교나 유교나 성경에 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각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대화가 천차만별로 진행이 될 것이니 서로 간에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말을 하지 않고 마치 닭 싸움하듯이 개 싸움하듯이 소 싸움하듯이 말을 하면 대화하기기 그렇게 쉽지가 않다는 것이고 더구나 비록 내가 신(God;Spirit)에, 즉 영(Spirit;God)에, 즉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I AM)에, 대한 경험이나 체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내 안의 내(Spirit)'가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출생한 사람으로서의 육체가 죽을 때까지 존재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상에서의 실제적인 나의 정체성은 여타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람인 이상 내가 경험하고 체험하고 그리고 '내 안의 나(Spirit)'를 통해서 신의 세계에서, 즉 영의 세계에서, 예정된 정도만 말을 할 수가 있지 더 이상 무엇을 말을 하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듯이 사람인 이상 신의 존재를, 즉 영의 존재를, 100퍼센트 알 수가 있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더구나 스스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완전한 존재가 될 수가 있거나 무엇에 관한 것이든 완전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마치 싸움부터 할 기세이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또는 무슨 일을 하고자 하든 하고자 하는 일을, 더욱더 힘들게 하지 않는가 싶다. 더불어 나도 가끔 느끼는 것이지만 교회의 사람들의 언행에 익숙하지 않으면, 물론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그렇게 보이겠지만, 집에서 성경이라도 읽어 보란 말을 했었다. 단어는 그냥 단어이니 비록 외국말이라고 하더라도 어색하게 생각을 하지 마시고 성경을 읽어 보고 믿는 것이 아마도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란 말을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성경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나라에서 왔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이 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에 앞과 같이 표현이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영이 거하는 경우일 것이고 굳이 우리 사회에서 사용하는 표현으로 나타내고자 하면 우리 사회에서 말을 할 때의 의미나 경우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신들린’, 즉 실제로 영(God;Spirit)이 거하고 있으니 그렇게 표현이 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몇몇 사람들의 신(God;Spirit)에 대한 개념이 이상한 것이 더 문제가 아닐까 싶지만,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란 말을 했다. 이 말이 또 누군지 모를 사람이 무속 신앙을 종교로 가지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무속 신앙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바를 바탕으로 추정할 수 있는 개념으로 말을 하자면 그리스도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여호와 하님과 그의 천사들에 의해서 그 존재와 세계와 사람의 사후 세계에 대해서 증거를 하기 위해서 예정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정말로 예기치 않게‘ 신(God;Spirit)의, 즉 영(Spirit;God)의, 세계의 신(God;Spirit)이, 즉 영(God;Spirit)이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세계의, 즉 신의, 즉 영의, 세계의 법칙에 맞지 않게 특정한 사람에게 스쳐지나 가게 된 것이거나 또는 몇 번에 걸쳐서 사람과 교류가 있게 된 것일 것이고 그를 바탕으로 사람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것을 몇 마디 할 수 있게 된 것이니 성경에서와 같이, 또는 선지자님들이나 그리스도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세계에 의해서 사람들이 그 존재와 그 세계와 사람의 사후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있거나 믿을 수 있는 형태로 나아가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과정 지켜야 할 언행으로서 나타날 수 있었던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싶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리고 여타의 경우로 추정을 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가지 그리스도 예수님 몸 안에 거했던 여호와 하나님 세계의 영은 그리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살아생전의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습으로, 형상으로, 물론 형체만 그렇지 육체의 본질 자체가 완전히 다를 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추정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나타나서 실제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거했었고 그리스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가 거짓이 아니며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와 사람의 사후 영혼의 세계가 존재를 하고 있고 또 사람의 사후 심판이 있음을 증거를 하고 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가끔, 우연찮게, 신이, 영이, 잠시 들린 것으로 사람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한 두 마디 말을 할 수 있는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위의 말이 최근에 득도하거나 깨달은 사람이 죽으면 사후에 그 영혼이 신이, 영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나 또는 득도나 깨달음과 관련이 없이 자신의 조상이 죽으면 사후 신이, 영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나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세계의, 즉 신의 세계의, 즉 영의 세계의, 즉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의 세계의, 즉 선택된 사람과의 관계의 표현이 주님의 세계의,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육체화 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육체화 된 것 자체를 신의 모습이라고, 영의 모습이라고, 성령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모두 공경의 대상이, 시험의 대상이,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관점이면 사람이 창조된 것이고 그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주신 생령도, 즉 사람의 영혼도, 거하고 있는 것을 고려를 하면 사람 자체도 사람의 관점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와 다를 바가 무엇일일 것인가? 성경에도 있듯이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적 본질에 의해서, 즉 영이란 존재적 본질에 의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만나거나 또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천사가, 거하는 사람을 사람의 관점에서는 신과 같은 존재란 뜻으로, 즉 사람의 모습과 사람을 통해서나마 신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신이라고 표현을 하듯이 성모 마리아님이나 요셉님이나 그리스도 예수님을 그와 같은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도 있듯이 그 몸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거한 것이었고 그 영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천사들의 도움을 통해서 자연을 움직이는 그리고 질병을 치유하는 그리고 사람에게 거해서는 되지 않는 영의 세계의 영을 쫓아내는 기적들을 일으키시고 행한 모습들이 아닌가 싶으며 그 과정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이 실제로 존재를 하고 있고 또 그 세계가 존재를 하고 있고 또 사람의 사후의 영혼의 세계가 존재를 한다는 것을 증거나 증명을 하는 일이 아닌가 싶으며 나아가 성경이 그런 것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을 증거를 한 일이 아닐까 싶다. 주객 전도나 본말 전도가 되지 않기를! 가끔 절이나 사찰에서 사용하는 향기를 통해서 ‘내 안의 나(Spirit)'란 존재가 귀신인지 마귀인지 또는 환생한 부처인지 무엇인지 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물론 어릴 때 가슴에서 그리고 귀에서 목탁 소리가 들린 것 등, 그 때 목탁 소리만 들린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그리고 귀에서 클래식 음악도 들려 귀가 터지는 듯한 경우도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언급을 했으니 참조 바람, 이유가 있는 일이지만 몇몇 약초나 약물로 약 20년에 걸쳐서 생체 실험을 하는 경우와, 몇몇 사람들의 모임이나 조직에서 그럴듯한 인물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발견이라도 되면 여러 가지 핑계나 구실로 대의와 공의와 정의를 위해서 특히 우리 것을 위해서 앞에서 언급한 연합체와 같은 곳에서 생체 실험을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우리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신(God;Spirit)에 대해서, 영(Spirit;God)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고통을 당하는 것이 신이, 즉 영이, 즉 내 안의 나(Spirit)가, 아니라 그리고 사람의 영혼이 아니고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육체의 모습의 사람이, 즉 사람의 육체가, 당하는 것일 것인데 그런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결여가 결국 때때로 신앙에 스스로 충만 된 사람을, 또는 기도에 모처럼 응답 받은 사람을, 또는 스스로 감동 감화된 사람을, 또는 스스로 심령이 감동 감화 되어서 은사를 또는 성령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을, 응급실로 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향수 가게에 가서 향수를 맡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개개인 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다른 사람 시험하지 말로 스스로에게 문의할 일이 아닌가 싶다. 십계명에 형상에 대한, 우상에 대한, 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닐 것이고 굳이 십계명이라고 하여 판에 새긴 것도 그냥 있는 일은 아닐 것이란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본질이 영(Spirit)이다 보니, 사람의 인지 능력을 초월한 영(Spirit)이다 보니,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만나고 교통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제한되어 있고 또 그 경우와 시기가 몇 십 년을 지구상에서 사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때때로 일정하지 않다 보니, 사람들이 무엇을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함을 잊거나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잊고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 것을 삶의 계명으로, 삶의 지표로, 삼을까봐 그런 것일 것이다. 흔들바위에 간 그 날은 교사 골탕 먹인다고 그런 것인지 호모를 만들려고 그런 것인지 때맞추어 이불도 부족한 것이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는 이런 현상을 두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한다. - TEN Production 영화 시나리오 제작 중 - 2007년 01월 20일 정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