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중심주의와 조서중심주의 02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사상의 자유와 이념의 추구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이 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일 것이다.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누구나 아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이론이고 철저한 이론이고 자유라고 하더라도 그런 이론과 그런 이론의 실천에 대해 이상 사회를 추구하고자 하는 의도나 지향성은 인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특성상,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의 속성상, 특히 사람과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가 가지게 되는 시간에 의한 습관 또는 관습 또는 타성의 속성상, 더구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만들어진 각양각색의 제도나 규정이나 법의 속성으로 인하여,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삶을 상대로 여러 사람들이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장난을 치는 것도, 더구나 집단 창작이나 공동 작업의 위세와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얼마나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들 완벽하게 준비를 했다고 하는 정치에 대한 정책들로서 우리 사회에서 정치와 관련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진 것으로 간주되는 상대방을 전혀 인정을 하지 못하겠다는 의도와 시도로서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도 일언반구의 대화도 없이 단순히 다수의 인해전술과 같은 위력으로서 특히나 서로가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됨으로서 서로 간의 Gap을 줄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서로에게 맞거나 이로운 뭔가를 추구하거나 구축해나가기 보다는 단순히 공격적이고 일방적인 화술로서 재미와 유희를 즐기는 것도, 장난과 재미와 유희의 결과로서 삶을 침해를 하게 되고 가정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상황이 되는 것도, 자유에 속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도 오래 전에 사상의 자유와 이념의 추구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약으로 인에 고통을 받은 것을 알게 한다는 명분으로 그것도 새로운 사회에서 정의와 의와 도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이 정말 우리가 말을 하고자 하는 자유와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에 속할 수 있는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 구분이 없이 획일적으로 적 아닌 동지로 나누어 생각을 하는 것이 그래서 각자의 사고와 행위와 전혀 관련이 없이 단순히 적 아닌 동지에 의해서 개개인의 모든 것이 판단이 되는 것이 사람 사는 사회에서 생각을 할 수 있는 일인지,
같은 편이면 무엇을 하든 심지어 민생 범죄와 같은 행위를 저질러도 그것도 장기간에 걸쳐서 다수를 동원한 조직적인 민생 범죄와 같은 행위를 저질러도 허용이 되고 새로운 정의와 의와 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이라도 되는 것인지 그런 것이 새로운 사회에서 말을 하고 있는 새로이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이고 논리인지,
조금은 의아스러울 때가 있다.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이 되고 뛰어나다고 생각이 되고 또 주위에 몇몇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이 되고 특히나 그렇고 그렇다는 영역이나 그렇고 그렇다는 판에서 어릴 때부터 오래 동안 있었는데도 또는 명색이 각 분야의 박박사인데도 또는 각 분야의 선남선녀인데도 왜 저희들에게는, 무엇이라고 표현을 해야 정확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설 또는 말을 할 또는 기획이나 참모가 될 또는 영향력을 행사할 또는 조정할 또는 규모를 떠나 판을 형성할 등등의 그렇고 그런 기회들이 주어지지 않고 왜 바보처럼 보이는 왜 바보 같아 보이는 사람에게 그렇고 그렇다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인지 달리 생각을 해보거나 말을 해보거나 할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냥 몇몇이 당을 만들어 소리 소문 없이 소리 소문만 만들기에 급급한 것 같아 보이고 또한 그런 기회들을 이용하여 뭔가 계속적인 생산성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을 도모하기 보다는 가야할 곳이 있고 사용이 되어야 할 곳이 있는 것들을 가로채는 식의 방식으로 일회성으로 끝나고 말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그렇고 그렇다는 활동 공간이 생기를 되찾고 활력을 되찾고 그 속에서 일들이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황폐해져가고 피폐해져가고 궁극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의 일과 일의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는 자본의 굴레에 구속이 되고 예속이 되는 모습들을 나타내 보이는 것 같아 보인다. Another Image of Long-Time-Ago's Custom인 것 같아 보인다.
경우에 따라선 주고받는 선문선답이, 또는 대화법이, ‘깨닫다’는 말이 무엇인가를 알게 할 정도로 재미도 있고 흥미도 있을 수 있는데 그냥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금력과 권력으로 세력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에만 뭔가 마음이 홀린 것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신앙의 방식도 사람의 생활 속에서의 실천이 아니고 말씀의 삶 속에서의 실천이 아니고 사람과 사람 속에서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이미 박재화되고 벽의 십자가에 걸리게 되고 글 속에 갇히게 되고 마이크를 타고 허공 속으로 떠돌게 된지 오래되었고 동영상으로 만들어진지 오래되었으니 무엇을 말을 하리요만 시대의 변화에 따른 또 다른 Custom을 보는 것 같다. 언제 'Idol' or 'likeness In This World'에서 벗어난 삶에 대한 계명이 살아 있는 때가 될 것인지...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삶에 대한 개념이,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이,
더불어 법에 대한 의식이,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것도 우려가 될 정도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런 일이 단순히 토론과 논쟁의 장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신성한 우리들의 삶 속에서 그 중에서도 신성한 신앙생활 공간에서도 일어난다고 한다면 어떨까? - 영화 촬영 중 -
공판중심주의와 조서중심주의 ==> http://www.hdj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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