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Politics)와 사명

(보완) "아들만 그리워했다"…'개구리소년' 부친 박건서씨 별세: 고인들의 명복을 기도하고 그 어떤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사건이 종결된 것이 아쉽습니다

정희득이본명이자가명 2023. 7. 9. 13:08

아들만 그리워했다"…'개구리소년' 부친 박건서씨 별세

1시간 전

 

https://www.msn.com/ko-kr/money/topstories/%EC%95%84%EB%93%A4%EB%A7%8C-%EA%B7%B8%EB%A6%AC%EC%9B%8C%ED%96%88%EB%8B%A4-%EA%B0%9C%EA%B5%AC%EB%A6%AC%EC%86%8C%EB%85%84-%EB%B6%80%EC%B9%9C-%EB%B0%95%EA%B1%B4%EC%84%9C%EC%94%A8-%EB%B3%84%EC%84%B8/ar-AA1dxVuN?ocid=winp1taskbar&cvid=c323cb3f248f46439cd12dff684304de&ei=68

 

 

고인들의 명복을 기도합니다.

더불어 경찰청의 노고에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20~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의 일로서도 그 어떤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사건이 종결된 것이 아쉽습니다.

여하튼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대구 달서구에 있는 와룡산의 위치나 산의 높이를 고려하고 또한 1991년 3월 26일 한 동네에서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철원(당시 13세)·조호연(12)·김영규(11)·박찬인(10)·김종식(9) 군이 아침밥을 먹고 "도롱뇽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 뒤에 있는 대구 달서구 와룡산에 올라갔다 실종되었다는 사건 경위를 고려하고 또한 이런 저런 증인들에 의한 당일날의 행적을 고려하고 또한 사건 발생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26일에는 와룡산 세방골에서 모든 실종 아동들의 유골이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을 고려하고 또한 비록 사건 발생 후 11년이 지났지만 5명의 아이들 중 4명의 아이들의 시신들에 대해서 수사상의 사유로 인하여 증거가 훼손되어서 한 아이에 대해서만 부검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로서 경북대 법의학팀이 유골 감정을 통해 '예리한 물건 등에 의한 명백한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을 고려하고, (참고. 비록 수사상의 사유로 인하여 4명의 아이들의 시신들에 대한 증거가 이렇게 저렇게 훼손되었다고 해도 4명의 아이들의 시신들에 대해서도 나머지 한 명의 아이와 같이 부검 등등을 해야 했을 것이고 향후에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 4명의 아이들에 대해서도 똑 같이 부검 등등을 했고 단지 법원에서의 물증으로서의 효력에 문제가 있으니까 한 명의 아이에 대한 것만 언론으로 발표를 했을까요? 만약에 그렇게 했고 지금 현재도 그렇게 하고 있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향후에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4명의 아이들에 대해서도 똑 같이 부검 등등을 했으면 수사의 방향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모를 것입니다. ), 또한 실종 5년째인 1996년 한 유명 대학 교수가 "종식이 아버지가 아이들을 죽여 집에 묻었다"라고 주장했던 것을 고려하고, (참고. 실종 5년째에 유명 대학 교수가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노망이 들었거나 지나치게 집착을 해서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비록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이지만 초등학교 2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5명의 어린 아이들이, 그것도 각 한 년 별로 한 명씩인 5명의 어린 아이들이, "도롱뇽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 뒤에 있는 대구 달서구 와룡산에 올라갔고 그런데 5명이 모두 살해되었던 것을 고려하고 또한 국내 단일 실종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연인원 35만명의 수색 인력을 배치했던 것 등등을 고려하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나 실종 경위를 끝내 밝혀내지 못했던 것이나 범인을 찾을 수 없었던 것 등등은 그 사실 자체가 미스테리한 일에 가까울 것이고 그러니 (비록 산이나 그 외의 지역에서 우연히 조우하게 된 사람들 사이의 일로서 우발적으로 발생했다고 해도) 그냥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은 아닌 것으로 추측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연인원이지만 35만명의 인력이 와룡산을 수색했는데 모든 실종 아동들이 와룡산 세방골에 묻히게 된 것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하면, 특히 경찰견의 능력을 고려했을 때에 그렇다고 하면, 그 사실 자체가 미스테리한 일에 가까울 것이고 그러니 (비록 산이나 그 외의 지역에서 우연히 조우하게 된 사람들 사이의 일로서 우발적으로 발생했다고 해도) 그냥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은 아닌 것으로 추측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발적인 사고로 5명의 아이들을 살해하고 암매장을 했는데 비록 연인원이라고 해도 35만명이 수색을 해도 그 흔적이나 냄새 등등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하면, 특히 대구 달서구에 있는 와룡산의 위치나 산의 높이를 고려하면, 결코 납득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대구시에서의 일로서나 와룡산에서의 일로서 5명의 어린 아이들을, 즉 비록 초등학교 2학년부터 6학년까지 각 학 년 별로 한 명이라고 하지만 5명의 어린 아이들을, 일시에 살해해야 할 일로서는 어떤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대구시에서의 일로서나 와룡산에서의 일로서 5명의 어린 아이들에게, 즉 비록 초등학교 2학년부터 6학년까지 각 학 년 별로 한 명이라고 하지만 5명의 어린 아이들에게, 들켜서는 안 될 일로서는 어떤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만의 하나의 일로서 '묻지마 범죄'라고 가정을 한다고 해도 대구시에서의 일로서나 와룡산에서의 일로서 5명의 어린 아이들을, 즉 비록 초등학교 2학년부터 6학년까지 각 학 년 별로 한 명이라고 하지만 5명의 어린 아이들을, 일시에 살해해야 할 경우로서는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특히 비록 도시에 인접한 산 또는 도시 안에 있는 산이라고 하지만 산에 가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경우로는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또는 "도롱뇽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 뒤에 있는 대구 달서구 와룡산에 올라갈 수 있는 아이들이 그 어떤 흔적도 남김 없이 일시에, 즉 그 어떤 공포에 의해서 5명의 아이들이 그 어떤 반항이나 도망도 해보지 못하고 조용하게 일시에, 살해될 수 있는 경우로는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조선시대의 500년 동안이나 유교가 국가의 관습과 같았고 그 이전의 고려시대의 500년 동안이나 불교가 국가의 관습과 같았고 그 이전의 삼국 시대의 일로서도 불교나 유교나 도교와 같은 인류의 종교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물론 1900년경부터의 일로서는 기독교가 국가 내의 종교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던,,, 대한민국 사회가 언제부터 무슨 사유로 이렇게 되었을까요? 비록 약 2000년 전부터 불교나 유교나 도교와 같은 인류의 종교가 한반도에서의 국가의 일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도 불교나 유교나 도교와 같은 인류의 종교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었거나 불교나 유교나 도교와 같은 인류의 종교를 이렇게 저렇게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용이 된 것과 같았고 실제로는 종교가 본래 종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종교로서의 역할이 미미했을까요? 아니면 1900년경부터의 일로서는 국가 내의 종교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던 기독교가 찬송 소리만 요란했고 설교만 요란했고 특히 각 종 전도 행위만 요란했지,,,실제로는 본래 종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종교로서의 역할이 미미했을까요?

 

,,,(참고. 요즈음과 같은 시대에는 지나친 억측이나 망상으로 간주되겠지만 그 부근에 군부대가 있었다고 하니 그 군부대를 표적으로 활동하는 고정간첩이나 남파간첩 등등이 있었는데 우연찮게 그날 와룡산의 그곳에서 5명의 아이을 만났고 그런데 고정간첩이나 남파간첩 등등으로서 활동하던 것이 들켰고 그리고 그 당시까지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군인이 대통령으로 있으니까 대북관계나 고정간첩이나 남파간첩 등등의 간첩활동 등등에 어려움이나 문제가 많이 있으니 정치적으로 대한민국에 소요를 일으켜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발생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부근에 군부대의 사격장이 있었고, (참고. 어떤 사격장이었을까요?), 탄피가 있어서 탄피를 줍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니 사격 후에 탄피가 어느 정도 생기는지 몰라도 만약에 탄피의 양이 상당했다고 하면 탄피를 줍기 위해서 등산한 사람들과 5명의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티격티격의 시시비비가 우연찮게 과실치사처럼 발생해서 그렇게 발생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여하튼 거듭 고인들의 명복을 기도하고 더불어 경찰청의 노고에도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20~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의 일로서도 그 어떤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사건이 종결된 것이 아쉽습니다.

 

참고)

 

본인 정희득의 댓글은 언론 기사에 대한, 특히 본인 정희득이 살고 있는 사회나 국가나 국가의 정치 등등에 대한, 본인 정희득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의견일 뿐이고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니 혹시라도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있을 경우에는 그 부분에 대해서 지적을 해주시면 그 즉시 수정을 해드리거나 삭제를 해드릴 것이니 그 어떤 법률적인 행동을 취하기 전에 꼭 연락을 주시면 서로에게 좋을 것입니다.

 

 

 

정희득